점심에 도시락 먹던 학창 시절이 기억난다.
지금은 모든 학교들이 점심에 급식을 실시하지만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다.
점심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는 도시락은 뚜껑을 여는 순간 아이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오늘은 엄마가 무슨 반찬을 싸주셨을까?
윤기가 흐르는 콩자반, 설탕과자처럼 바삭거리는 멸치볶음, 감칠맛 나는 김치 볶음, 탱글탱글한 비엔나소시지, 매콤 짭짤한 진미채 볶음 등등 매일 아침마다 엄마의 정성을 가득 담은 도시락으로 우리의 점심 만찬이 성대하게 펼쳐진다.
도시락에도 빈부격차는 있어서, 매일 햄과 소시지, 돈가스를 싸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매번 김치와 김만 싸오는 친구도 있었다. 한 친구가 싸오는 김치볶음은 맛있기로 소문나서 그 친구가 김치 볶음을 싸오는 날이면 친구들이 서로 맛보기 바쁜 반면, 어떤 친구는 엄마의 음식 솜씨가 정성에 못 따라가 친구들의 젓가락 방문이 뜸할 때도 있다.
반찬 중에 제일 인기 없는 반찬은 김치다. 맛은 둘째치고 김치를 담으면 늘 국물이 줄줄 흘러, 운이 나쁘면 책은 물론 가방 전체가 김칫국물 범벅이 된다. 김칫국물에 젖은 것도 속상한데 냄새도 심해서 엄마에게 김치를 싸지 말라고 하지만, 엄마는 김치를 안 먹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리는 것처럼 무조건 김치를 싸주셨다.
도시락 중의 꽃, 소풍 도시락
요즘 학생들은 각자 자기 먹을 것만 준비하면 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 드실 것도 챙기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반장 엄마는 선생님 점심식사용으로 5단 찬합을 함께 들려 보냈고 선생님들께서 식사하시는 자리에는 항상 잔치상 안 부럽게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이 넘쳐흘렀다.
우리 엄마는 늘 김밥과 김치를 함께 담아주셨다. 오이, 단무지, 김밥햄, 맛살이 들어있는 심플한 김밥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삭 거리는 식감을 좋아해서 엄마가 싸주시는 오이 김밥을 맛있게 먹었지만 친구들 중에는 오이 냄새조차도 싫어하는 아이가 있어서 그 친구는 내 김밥을 볼 때마다 코를 막고 손을 내저었다.
기억에 남은 친구 도시락
내가 제일 부러웠던 도시락은 점심시간 직전에 따끈따끈하게 도착했던 고등학교 친구의 도시락이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 매일 잤는데(그 친구는 나중에 알고 보니 공부를 엄청 잘했다), 그 사실을 친구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점심시간에 맞추어 항상 도시락을 챙겨 오셨다. 딸이 따뜻한 밥을 먹기를 바라셨던 마음이 느껴졌는데, 금방 한 밥만큼 맛있는 것도 없겠지만, 반찬도 늘 불고기와 상추쌈, 떡갈비구이, 참치 김치찌개 등 우리가 흔하게 싸오지 못하는 반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짝꿍일 때는 너무 즐거웠다. 따뜻하고 맛있는 반찬을 함께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간식도 늘 남다르게 챙겨주셨는데, 그중 항상 챙겨 오던 삼각팩에 담긴 커피우유는 어느 날부터인지 항상 내 몫까지 왔었다.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도시락
딸을 낳으면 냉장고에 남는 것이 없다고 했던가. 연애를 드라마로 배웠던 나는 본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나의 여성스러움을 마구 뽐내고 싶었던 건지, 데이트하러 가던 날 냉장고를 탈탈 털어 도시락을 싸간 적이 있었다. 김밥, 유부초밥, 샌드위치, 과일 등등 3단 찬합 가득 도시락을 싸 보겠다고 3~4시간 동안 끙끙댄 거는 비밀로 한 채, 혹시라도 맛없다고 할까 봐 맘 졸이고, 그럼에도 맛있다고 먹어주는 모습을 보면 즐거웠던 것 같다. 지금은 물론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혹여 누가 도시락을 싼다고 하면, 그냥 맛집에서 포장해 먹는 게 여러모로 경제적이라고 해 줄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싸주는 도시락
학창 시절에는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반찬이 맘에 안 들어 짜증 낼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돼서 아이 도시락을 싸 보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지금 아이들은 어린이집 때부터 단체 급식을 하니 엄마가 도시락을 싸야 할 때는 소풍 때가 전부이다.
1년에 2번 있는 소풍날, 엄마들은 아이들이 먹기도 좋고, 누가 봐도 예쁜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각종 스킬을 시전 하며 도시락 싸기에 열중하고 작품의 경지에 오른 도시락을 인증하기에 바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평범하게 직접 싼 김밥이나 주먹밥과 함께 과일을 담아 보내는 엄마도 있고, 단체로 도시락을 업체에 맞추는 엄마들도 있다. 평소 요리실력이 부족하거나 너무 바쁜 엄마는 맛있다는 김밥집에서 사다가 도시락에 담아 보내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의 첫 소풍 때 긴장한 나머지 나도 이것저것 싸서 보냈다. 김밥, 과일, 치킨너겟, 딸기잼 롤 등등... 아이들은 다녀와서 아주 정확하게 피드백을 해주었는데, 다른 친구들 도시락을 보고 부러웠던 점, 다음에 안 싸줘도 되는 것이나 먹고 싶은 것 등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소풍 전에 아이랑 무엇을 얼마큼 싸갈지 상의를 하고 소풍 도시락 준비를 하면 돼서 나는 한결 수월해졌다.
나에게 도시락이란?
나에게 도시락은 빈부 차이였다. 왜냐하면 동생과 반찬 차별받던 도시락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과 첫째라는 성향 탓에 반찬투정 없이 싸주는 대로 도시락을 먹고 다녔다면, 어렸을 때부터 귀한 아들 대접받던 남동생은 반찬을 남기고 오기 일쑤였다. 엄마는 동생이 좋아할 만한 햄이나 소시지, 돈가스 등 맛있는 것들 위주로 싸주고 나는 김치나 마른반찬 위주로 싸주셨는데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엄청 속이 상해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울면서 속상함을 토로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엄마도 없는 살림에 두 아이 도시락 챙기는 것도 보통이 아니었을 듯싶다. 아빠와 함께 일하고 돌아와 반찬거리도 없는데 아침마다 도시락은 싸줘야 할 때의 마음이 어땠을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간다. 지금처럼 밤 12시 전에만 주문하면 새벽 배송으로 식자재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텐데, 일 끝나고 저녁에 오시니 장 볼 시간도 거의 없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대단하셨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