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시간 여유가 생기자 동네 엄마들과 어울려 커피 한잔하며 수다도 떨고, 함께 쇼핑도 하러 다니고, 힘들 때는 남편보다 더 위로가 되는 엄마들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도 1년이 넘게 흐르다 보니 내가 너무 생산성 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에 애들 등원시키고 바로 복지회관 셔틀버스에 올라 한 시간씩 운동을 하고 왔다. 몸도 건강해지고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운동을 하고 와서 집안일을 해도 시간이 남으면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때우기 일 수였다. 남는 시간 짬 내서 일할 거리를 찾다가 학교급식 배식 도우미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 점심 먹는 시간에 2시간 반 정도 가서 도와주면 되는 일이었다. 같이 어울리는 엄마들과 함께 지원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단순하게 아이들 배식하는 것만 하는 줄 알았는데 쓰레기 치우기, 식당 청소까지 함께 해야 했다. 몇백 명의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주로 밥이나 국, 또는 함께 봉사 활동하는 아이들이 다칠 수 있는 뜨거운 음식은 우리가 나눠주었다.
몸을 써서 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잡생각은 나지 않아 마음은 편했지만, 몸이 너무 고되었다.
식탁을 닦을 때도, 3단계를 거쳐야 했고, 바닥을 쓸고 닦고, 유리창과 문을 닦고, 무거운 쓰레기를 날라서 버리고 등등
작업복을 받았는데 겨울에는 너무 추웠고, 여름에는 너무 더웠다. 조리실에서 일하는 분들에 비하면 단순한 일이었지만, 저질체력이었던 나는 매일 일을 마치고 오면 온몸이 쑤셔서 한 시간 정도 누워있지 않으면 아이들을 돌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좀 덜 힘들었지만 워낙에 노동강도에 비해 급여가 적은 곳이라 조리사님들도 부상으로 쉬시는 분들이 많았고, 배식 도우미들도 힘들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함께 일을 시작했던 엄마들도 사정이 생겨 그만두고 나는 더 남아서 2년 넘게 일을 했다. 일을 하다 보니 사무직 알바에 대한 열망이 커져 옮기게 되었는데 돌이켜보니 모든 일에 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마음이 편하면 몸이 고되고, 몸이 편하면 마음이 힘들다고 했다는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아이를 낳아 정신없이 키우던 30대는 인생에 암흑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뭐 하고 있었는지 애만 키우다 존재감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3~4년 정도의 시간을 육아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간을 보내며 내가 얻은 것은 단돈 몇십만 원이라도 내 힘으로 벌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외벌이 남편은 늘 맞벌이 부부를 부러워했고, 지나가는 말이라도 '힘들게 일하지 말고 집에서 애나 신경 써서 잘 봐'라고 한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짊어지는 가장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그 무게를 좀 덜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워킹맘의 딸로 자라면서 느끼던 외로움과 쓸쓸함을 아이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고집을 부리듯 내가 아이들을 더 끼고 지냈다. 그러면서 '나도 적지만 돈 벌어, 나 투잡 뛰는 거야'라고 조금이나마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점점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친하게 지내던 엄마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는데, 내가 어울리지를 못하니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한 건데, 나는 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지만 예전만큼의 유대관계는 없으니 가끔 외로울 때 더 아쉽게 느껴진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직관계에서 유연함이 생겼다는 것이다.
20대 회사원일 때에는 나이 한 살, 직급에 민감해하며 엄격한 잣대로 상하 위계질서를 따졌는데, 애를 낳아 키워보니 그런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여유가 생긴 건지, 나이나 직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위치에 맞게 주어진일을 충실히 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10살 정도 어린 상사가 00 씨라고 불러도 감정의 동요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뭣이 중한데!'라는 마인드가 생겼달까?
이런 나의 말을 듣고 꾸준히 한 직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남편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그게 되냐고? 자기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거치며 삶의 자세를 다시 배운 듯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지만, 그때까지도, 어쩌면 지금도, 머리로만 생각하고 마음이 그렇지 못한 나였다.
하지만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되서였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버는 것은 위대하고, 그런 노동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칼라가 최고라고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니라고 부정해도 마음 한구석에 문신처럼 새겨져 버린 그 생각을 지우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생각의 변화를 얻게 된 것만 해도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한창 식품 관련 아르바이트를 할 때, 제품 구성 및 개발, 쇼핑몰 구성 기획을 고민할 때 잠시 잊고 있던 예전 꿈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커서도 그 주변에서 서성이게 된다는 말을 TV 강연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식품영양학 쪽으로 관심이 있었는데, 성적 때문에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의 아쉬움이 이렇게 학교 급식부터 시작해서 식품 관련 알바로 이어져오게 됐다고 생각이 들었다. 관련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원이라도 진학을 해야 할까, 푸드코디네이터 같은 자격증이라도 따 볼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아마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었고, 부족한 내가 싫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잊고 있던 사실 하나! 아르바이트는 직업이 아니다. 임시로 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너무 몰입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좌절과 서운함을 안고 일을 그만두면서 그때부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어 결국 나를 찾아가는 이 시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금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며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아깝게 허비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결코 아까운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를 찾아가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한 단계 성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