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지만 남들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던 20대에 나는 딱 한번 그것도 채 한 달을 못 채운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내 경험의 전부였다. 핑계라면 부모님이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받으라는 말과 내가 하고 싶은 알바는 외모 자신감이 매우 떨어졌던 때라 도전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자신감 있게 도전했으면, 부모님 말씀에 순종적이지 않았다면, 나도 남들처럼 돈 모아 워킹홀리데이나 유럽 배낭여행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늘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 또한 내 선택이었으므로 현재라도 아쉬움 없이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블로그 홍보는 흐지부지 되고, 포토존은 기약 없이 멀어지고, 이 정도면 잘릴 만도 한데 나를 좋게 보신 건지 대표님은 자꾸 내 몫으로 수입을 창출해 낼 일을 만들어주고자 하셨다. 어느 날 나를 카페로 부르시더니 식당의 후식 커피 판매 공간쯤으로 전락해버린 이 공간을 머물고 싶은 곳,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오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나도 공감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원두를 골라가며 마실 정도의 깊이는 없었고, 아메리카노 샷 내리는 것도 왔다 갔다 하며 어깨너머로 겨우 배운 상태였다.
프랜차이즈를 접목해볼까도 고민하셨지만 비용 문제가 걸렸고, 일단 일 년 중 식당에 사람이 가장 붐비는 여름이 다가오니 그걸 대비해서 여름 음료를 개발해 보라고 하셨다. 생과일 주스를 팔고 싶어 하셨는데 자회사로 농산물 식자재를 학교 급식에 납품하는 곳도 있어서 저렴하게 과일 수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딸기주스와 수박주스를 미션으로 주셨고 대표님의 지인을 통해 레시피를 전해받았다.
같은 레시피라도 사람마다 맛이 다르니 일단 시음을 위해 테스트를 해보았다. 일단 근처 식자재마트에서 필요한 것만 우선 장을 봐서 테스트를 했다. 역시나 맛이 없었다. 이제 어쩌지?
카페가 오픈하면 손님들 때문에 내가 있을 공간이 없다. 카페에 음료 준비하는 바는 한 평도 안 되는 것 같다. 성인 여성 둘이 서면 꽉 차서 움직이기도 비좁은 곳이다. 시음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내 업무 시간 중 딱 두 번이 있는데 한 번은 출근하자마자 카페 오픈 전, 두 번 째는 식당 브레이크 타임 때다. 다해서 1시간 반 정도가 주어지는데 카페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고 메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혼자서 바에 들어가서 우왕좌왕 헤매기는 시간이 전부였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전담 직원을 따로 두는 것이 아니라 식당 직원들이 그때그때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드는 구조였다.
주변에 카페를 하는 지인도 없는데 어디서 레시피를 구하나 막막했다. 대표님의 딸이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알바 경험이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딸에게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가도 일단 맡겨진 일이니 언제나 그렇듯이 열심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출처 : Pixabay 검색, ExplorerBob
우선 네이버 카페를 검색해서 가장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곳에 가입을 했고, 그곳에서 현재 핫한 과일음료와 레시피를 정리했다. 대충 정리한 바로는 일 년 내내 인기 과일 주스는 딸기주스(딸기 스무디)였고, 기본적으로 에이드 제품을 팔고 있었다. 계절별로 제철과일에 맞게 청을 담가 음료를 만드는 카페들도 있었으나 이곳은 그렇게 청을 만들고 담당할 직원이 없었다. 만약에 내가 그 메뉴를 만든다면 레시피만 정리해서 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 준비까지 내 담당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간소하고 맛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여름이 다가오니 수박주스에 대한 정보가 넘쳤다. 집에 와서도 레시피를 찾아보느라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일단 한 가지 메뉴라도 완성해 보자 싶어서 수박주스부터 도전을 했다. 대략적으로 압축된 레시피는 3가지, 수박을 한통 사와 자르고 레시피에 맞게 갈아서 사무실 직원을 대상으로 시음 테스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 그나마 반응이 있던 한 가지 레시피를 조금 손보기로 했다. 그러다 발견한 신박한 레시피!! 가장 심플하고 가장 단순한 비법이었는데 맛이 가장 좋아서 바로 ok를 받았다.
그렇게 바로 메뉴로 결정되어 단독 메뉴로 바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여름 나는 매주 10통 가까이 되는 수박을 잘랐던 것 같다.
이어서 에이드 메뉴 출시!
한번 요령이 생기니 업체 정보까지 빠르게 써치를 해서 제품 샘플을 받았고, 바로 테스트를 해서 에이드는 일사천리로 3가지를 만들어냈다. 레모네이드, 청포도 에이드, 자몽에이드
그동안은 가루로 된 블루 레모네이드를 팔고 있었는데, 메뉴를 만들고 나서 수제청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과육이 씹히는 에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일단 안정적으로 메뉴가 정해지니 대표님은 딸기주스에 미련이 남았있었지만 생딸기가 아니면 냉동딸기로는 대표님이 원하는 맛을 따라올 수 없음을 인정하셨고, 수박주스의 대박으로 더 이상 나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음료를 만들고 기본적인 디저트 (케이크, 빵, 쿠키)까지 세팅을 끝냈다. 대표님은 직접 빵 굽는 냄새가 카페에 가득히 퍼지기를 원하셨지만 기구와 공간의 제약, 그리고 빵을 구울 사람이 없다는 점 (물론 빵을 구우면 그것도 내 몫이 되겠지만)을 이유로 업체에서 납품받는 디저트로 만족해야 했다. 한동안 음료 개발을 하면서 컵의 사이즈도 공부를 하고, 알맞은 컵홀더도 디자인하고, 메뉴가 나오면 없는 솜씨에 파워포인트로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는 열정의 시간이었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 파워포인트로 포토샵처럼 흉내를 냈다. 아마 포토샵을 할 줄 알았다면 대표님이 디자이너 채용을 안 하셨을 듯하다) 중간에 대표님의 배려로 킨텍스 식품박람회 디저트 부스 참관도 다녀오고 한동안 카페가 내 것이라도 된 것처럼 신나게 일했던 것 같다.
수박주스 이후 이어갈 신 메뉴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에게는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레 카페에서 멀어졌다. 음료와 디저트 준비하는 동안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 디저트 가게를 하고 있는 지인에게 알게 모르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나는 시급 7530원의 사무보조로 뽑힌 아르바이트 생이라는 점이다.
나는 대표님 말씀처럼 내가 받아갈 돈만큼의 값어치를 한 걸까? 아니면 열정이 넘쳐 주제넘게 회사를 휘젓고 다닌 건 아닌가 싶다. 늘 나의 모토는 '받은 만큼 일합니다'인데 자꾸 넘치게 일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