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귀양 생활, 고난 속 의지
오성의 귀양 생활은 참으로 어렵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단지 외진 곳에 사람을 머물게 할 뿐 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굶주려 죽음에 이를 지경이 되어야 겨우 관청에서 입에 풀칠할 정도의 식량을 겨우 지급했으며 나머지는 온전히 귀양 온 자신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상식 이하의 처우는 귀양 온 자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더구나 오죽하면 귀향한 이원익은 손수 돗자리를 짜 생계를 도맡았다 합니다.
오성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때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귀양지에서 중풍 증상까지 겹쳐 손이 떨리며 스스로를 돌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식사는 맞지 않고 마음의 부담까지 더해져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으며 낯선 곳에서의 생업은 더욱 막막했습니다.
그는 “난 또 병이 들어 죽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편지를 보면 짐작할 것이다.”라는 짧은 편지로 안부를 전했습니다. 옛 친구 이호민에게 보낸 이 글은 겨우 손에 펜을 쥔 채 고통 속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한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매서운 추위와 궁핍한 환경 속에서 친한 친구마저 잃으며 더 쓸쓸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든든한 구원투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충신이라는 벗이었습니다. 정충신은 멀리 서울에서 오성의 몸상태를 점치고 즉시 음식을 준비해 달려왔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수도권과 먼 북청까지 달려온 그의 모습은 진정한 의리와 인간미를 증명합니다. 그는 물김치와 싱싱한 샘물을 가져왔고 오성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오성은 “정충신이 왔구나 지금 어디냐?”라며 한눈에 친구임을 알아보고 반가움과 안도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함께 지내며 몸과 마음의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함없는 신의를 지키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오성의 병세는 점점 심해졌고 5월 11일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함께 용상에 앉아 있는 광경이었으며 그중에는 선조 임금과 유성룡 김명원 이덕형 같은 재상들이 나왔습니다. 꿈속에서 선조가 화를 내면서 광해군이 형제를 해치고 어머니를 폐하고자 한다고 했으나 곧 한음이 나타나 “오성이 없으면 이를 결정할 수 없으니 빨리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 오성은 자신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2일 뒤 5월 13일 이항복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광해군 시대 권력 투쟁의 한 단면이었으며 한음과 오성, 두 친구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입증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역사에서 퇴장했으나 그들이 남긴 영향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죽음 소식을 전하자 광해군은 마치 한음 때와 같이 오성의 관작 회복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조정과 여론은 여전히 반대했고 역적을 다행스럽게도 죽었다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백성과 선비들은 오성을 기리기 위해 모이고 제문을 올렸으며 이항복의 상여는 포천에 묻혔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논어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입니다. 오성과 정충신의 우정은 먼 거리와 고난을 넘어 변치 않은 진정한 벗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혼돈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과 의리를 지키려 했던 그들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