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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22. 2020

쉬운 동양 철학 5

맹자 VS 순자 (feat. 고자)

<<맹자>><공손추>상편을 보면 맹자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본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로 규정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고통에 빠진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동정심, 즉 측은지심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의심과 감각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 속에 빠지려는 상황을 목격하면,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관찰해보면 ‘측은해하는 마음 (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 (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 (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 <공손추> 상편

우선 위기에 빠진 아이의 부모로부터 얻을 이익을 생각하거나, 혹은 의로운 사람이란 칭찬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의식적 사유나 분명한 감각 경험에서 측은지심이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측은지심은 우리 내면의 깊은 무의식적 층위, 즉 본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 네 가지 마음이 본성에서 유래하기에, 맹자는 본성에는 네 가지 본질적 계기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다.

그럼 내면 깊은 곳에서 이러한 본성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인간이 악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자의 답은 매우 단순하다. 인간은 자신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본성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맹자>><고자> 상편에서 맹자가 “인의예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부지불식간에 항상 우리 마음에 실현되고 있으니, 이것을 자각하라는 이야기다.

맹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 선한 본성의 실현은 주체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맹자의 생각은 현실 사회에서 국가 공권력과 사회규범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논거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은 국가 질서, 학문, 관습 등과 같은 외적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 권력과 훈육 체계를 부정하는 논의는 순자에게 있어 비현실적인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순자의 현실주의란 주어진 국가권력과 관습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순자의 견해처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전제할 때 그것을 교정하고 순치할 수 있는 외적 강제력, 즉 국가권력이나 전통적인 예의전장제도(禮義典章制度)들이 의미심장하게 부각될 수 있었다. 이걸로 부족했던지, 순자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으로 질서와 규범을 공고히 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지만 그것을 충족시켜줄 재화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예(禮)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순자의 입장이다. 이런 순자의 입장에 따라 반대로 인간에게 외적인 공권력이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경우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재화를 놓고 일종의 전쟁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순자가 개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순자가 가장 강조한 개념은 ‘인위’를 뜻하는 ‘위(爲)’였다. 사람을 뜻하는 ‘인(人)’과 행위를 의미하는 ‘위(爲)’로 구성되는 글자답게 ‘위(爲)’는 개개인의 주체적 노력과 능동적 행위를 의미한다.

어쩌면 맹자와 순자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지도 모른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맹자가 그의 내면에 본성으로 존재하는 인의예지에 주목한다면, 순자는 그의 외면에 제도나 책으로 존재하는 인의예지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맹자보다 순자가 우월해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이 성인이든 군주든, 순자는 우월한 자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위를 제공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군주들이 맹자를 멀리하고 순자를 존경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군주 권력이 강해질 때, 순자의 사유는 항상 각광을 받았다. 반대로 지방 호족세력이 득세할 때, 그들은 맹자의 사유로 자신들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선과 악의 개념이 항상 사회적 차원의 치(治)와 난(亂)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잔정한 인성론은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체성에 대한 성찰을 전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오히려 고자야말로 인성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논리를 피력했던 유일한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무선무악(無善無惡)’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인간의 개체성에 대한 일체의 사회적 논의를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맹자>> <고자>상편에는 사람의 본성과 관련된 고자의 테제가 몇 가지 등장한다. 첫째는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술잔과 같다"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이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에 동쪽으로 길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길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른다. 사람의 본성에 선과 불선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이 동쪽과 서쪽에서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역동성이지 선이나 불선 같은 외적인 규정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고자의 속내였다. 인간의 본성을 파릇파릇 살아가는 버드나무에 비유하거나, 어디라도 흘러갈 수 있는 물에 비유했을 때, 고자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바로 ‘삶’그 자체였다. 살아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고 살아있기에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님이 “인생은 똥밭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기에 별을 올려다볼 수 있고 살아있기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했을 때 그렇게 받아들여주니 고맙다고 하셨다. 내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강의를 하며 명사초청을 위해 메일을 드렸을 때의 일이다. 그걸 허무주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던 반면에 삶에의 의지로 받아들이는 나 같은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말씀이셨다.



순자의 초상화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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