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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피쌤의 책장 Sep 30. 2023

화려한 포장지 뒤에 숨은 나

리더와 뤼더사이 1

 예전에 화제가 됐던 드라마 중 ‘아내의 유혹’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이 점하나 찍고 전혀 다른 사람인 ‘민소희’로 돌아와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다. 똑같은 사람이 점만 찍고 다른 사람이 된다는 다소 오버스러운 설정이 희화화되기도 했었다. 


 처음 영어책 읽는 북클럽 리더를 맡으면서 별생각 없이 닉네임으로 ‘쏘피쌤’을 썼다. 그런데 모임의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쏘피쌤'으로 불렀다. 나는 북클럽의 리더이자 말 그대로 그들의 ‘선생님’이 되었던 것이다.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 되듯 ‘쌤’ 하나 붙이니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별것도 아닌 내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고 깍듯이 대해주는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민망해서 자주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쌤’이라는 단어를 빼고 다시 클럽으로 돌아오고 싶은 때도 많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매년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학기 초 처음 출석을 부르는 시간은 늘 공포스러울 정도로 긴장됐다. 내 이름이 불릴 순서가 점점 다가오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특이한 이름을 애들이 놀리면 어쩌지?’ 허스키해서 콤플렉스인 목소리도 문제였다. ‘네’라고 대답하면 모두 비웃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늘 움츠려 있는 작고 소심한 아이였다. 희한한 건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는데 학창 시절 자꾸 반장을 했다. 

 

 지금도 어느새 천명이 넘는 북클럽의 리더가 되어있다. 매번 온라인 회의가 있을 때마다 긴장이 되어 땀으로 티셔츠가 젖곤 했다. 직접 사람들을 만나는 오프라인 모임이라도 있을 때면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리더니까 어떤 모임이든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때로는 너무 버거웠다. 전에 MBTI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결과는 내향, 감각, 사고, 판단 지표가 높은 ISTJ였다. 검사 후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은 내향적인데 리더십이 있어 내적 갈등이 많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북클럽을 만들고 일 년 뒤 규모가 커지면서 어느새 매달 6권의 원서를 읽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모든 책을 다 읽고 있었다. 리더라서 모든 책을 다 읽고 함께 참여하면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틈만 나면 영어 책을 읽었다. 하루 대부분을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전까지 매일 아침 하던 요가도 그만두고 책만 읽었다. 책상에 늘 숙이고 앉아 있다 보니 어깨는 굽고 허리도 아팠다. 너무 바빠 툭하면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웠다. 모든 게 다 영어책 읽기 뒤로 밀려 버렸다. 싱크대에 설거지가 수북이 쌓여있었고, 덩달아 빨래도 쌓여갔다. 보여주기에 급급해 1년을 영어책만 읽어댔다. 리더라는 완장을 차고 스스로 만든 높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점점 오디오북으로 대충 흘려듣는 책이 많아졌다. 책장을 넘기고 있어도 내용이 안 들어오는 책도 많았다. 그렇게 계속 읽는 척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포장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읽고 있다고 고백했지만, 이미 과장된 이미지는 나를 가리고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같은 직업을 가진 공부방 선생님들 카페에 처음 가입했다. 당시 각종 방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얻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카페에서 보는 선생님들은 정말 모두 하나같이 대단해 보였다. 수업도 잘하고 수입도 엄청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점점 나만 형편없이 느껴져 마음의 병이 났던 적이 있었다. 비교 병에 걸리니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우울해만 있던 그때, 스스로 찾은 출구는 원서 읽기였다. 원서를 읽는 내 자신은 그나마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더 많은 사람들과 이 즐거운 취미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마흔여섯 번째 생일날에 온라인 원서 북클럽을 만들었다.     


 즐겁게 원서 읽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쓸모가 있게 느껴졌다.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멤버들한테 기운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포장된 이미지로 또 누군가의 마음에 병을 주고 있을까 봐 자책이 들기 시작했다. 


 채팅방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온라인 공간이니 물결, 하트를 열심히 섞어가며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평소 무뚝뚝하고 말없는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야말로 스위트하고 다정한 리더 쏘피쌤만 있었다. 결국 포장을 하고만 것이었다. 영어 잘하는 척, 책 많이 읽는 척, 친절한 척 내가 만든 포장 속, 내가 날 보고 있었다. ‘척’ 무늬의 포장지를 걷어내고 깊은 속을 들여다봤다. ‘너는 왜 여기서 이렇게 척을 하고 있니?’ 스스로에게 묻고 답다. 

 

 나는 예쁜 포장지를 좋아한다. 포장지가 화려한 건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안에 든 것이 진짜면 된다. 함께 영어책 읽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빛나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이런 빛나는 마음을 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는 점 대신 '쌤'을 붙이고 내게 주어진 '리더'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한다. '쏘피'가 '쏘피쌤'이라는 포장지를 만나는 순간이 내겐 어쩌면 진심을 포장하는 마법 같은 변신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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