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와 뤼더사이 2
그날 아침도 한참을 노트북과 휴대폰을 번갈아 보며 화면 속 숫자와 씨름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북클럽에서 열심히 인증하며 책을 다 읽은 멤버들에게 참가비를 돌려주는 날이었다. 100명이 넘는 멤버에게 일일이 계좌 이체 하는 것은 늘 적응 안 되는 일이었다. 페이백이 끝나고 뻐근해진 뒷목을 잡고 있자니 갑자기 모든 게 억울하다. ‘아...... 이게 무슨 고생이야! 돈도 안 되는 일 한답시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온 한숨이 바닥을 타고 온방에 퍼진다. 북클럽을 이끈지 1년이 지났을 때쯤 내 앞에 남은 건 설렘이 빛바랜 To-do List뿐이었다.
코로나가 한참 심각할 때라 남편 월급이 삭감된 지 반년이 지났었다. 나도 기존에 하던 수업을 호기롭게 그만두고, 새로 시작한 일에서 보기 좋게 물을 먹고 있었다. 아파트 대출금을 필두로 지출이 수입을 바짝 따라 붙은 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나는 그때 돈이 빠듯했다. 돈을 더 열심히 벌어도 부족한데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지난여름 어느 새벽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비춰보였다.
새벽 5시, 알람처럼 제때 떠진 눈을 깜박거리며 별과 인사를 나눈다. 차갑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아침 공기를 약수처럼 몇 모금 들이 마시니 정신이 든다. 동 트기 전 하늘은 고요하지만 분주하다. 부엌으로 가서 뜨거운 물 반, 차가운 물 반을 섞어 따뜻한 물로 공복을 달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열고 5ABC, 5 A.M Book Club 새벽 5시 원서 읽는 모임의 문을 연다.
부스스한 머리와 부은 눈의 새벽 영혼들이 하나둘 노트북 화면을 채운다. 말없이 각자의 방에서 책을 펴고 어제 읽고 난 다음 장을 읽기 시작한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여전히 고요한 새벽이다. 한 시간 가량 지난 후 알람이 울린다. 오늘의 독서에서 얻은 통찰을 나누며 마무리한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아침이다.
북클럽에는 새벽 다섯 시 책 읽는 5ABC 외에도 다양한 스터디 모임이 만들어졌다. 토요일 아침 6시에서 8시까지 다양한 주제로 영어 토론하는 리씽크는 여전히 활발히 진행되는 장수 클럽이다. 그밖에 원서에서 발췌한 구문들을 난이도별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구독원해 클럽 , CNN 뉴스를 함께 필사며 인증하는 모임, 영어 채팅하면서 회화 연습하는 방, 함께 어휘 책을 정해서 공부하는 모임, EBS 영어 회화 스터디 클럽, 매일 밤 원서를 돌아가면서 읽는 야간 낭독클럽, 재미로 하는 왼손필사 모임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소모임 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놀이터에서는 영어도 배우고 그동안 쌓아둔 영어 실력을 뽐내며 신나게 놀았다. 그 재미가 너무 커서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놀아도 지겹지가 않았다. 영어 학습을 넘어 저축해둔 영어를 소비하는 재미는 생각지 못한 통장 잔고를 발견한 기쁨보다 컸다.
-코로나 우울증 때문에 힘들었는데 함께 원서 읽으면서 많이 극복했어요.
-태어나서 처음 영어책을 읽었는데 완독까지 하니까 엄청 뿌듯하네요.
-7년 동안 게임에 중독되어 휴대폰 게임만 했습니다. 그런데 북클럽으로 초대해주셔서 게임을 끊었어요. 쏘피쌤이 제 삶을 바꿔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 원서를 완독하고 감동의 메세지를 보내주는 멤버들이 종종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문자지만, 성취감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단순히 영어를 공부하려고 시작한 취미활동에서 자신이 가진 외국어 기술의 쓸모를 찾아서 기뻐보였다. 우리가 함께 주고받는 영감 또한 값진 보너스였다.
리더라는 이유로 과분한 감사인사를 받을 때면 민망함과 만족감이 교차한다. 나 같은 게 뭐라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하는 말이겠지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가슴 한구석이 뿌듯함으로 채워진다. 내가 깔아놓은 이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멍석위에서 재밌게 놀며 기쁨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진다.
책상 위 노트북을 덮고 의자 뒤로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는다. 팔짱을 끼고 스스로에 묻고 있다. ‘그래서 얼마를 받으면 만족하겠어?’ 물론 마음도 얻고 금전적 보상도 챙기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지금 이 아름다운 감사의 마음은 리더로서 받는 또 다른 월급이다.
마흔이 넘도록 뭔가를 대가 없이 준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감사를 받은 기억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야 재지 않고 나누는 경험을 북클럽을 이끌면서 얻게 되었다. 나를 통해 누군가가 성장하는 기쁨을 보는 것은 금전적 보상과는 또 다른 만족감을 주었다.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충만한 보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돈으로 살수 없는 보람과 만족.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했던 몸을 편안하게 의자에 기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