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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 Jan 24. 2022

떡볶이 좀 그만 사 먹어!

1986년, 전설의 시작 

2학년 때인가. 동아 상회 뒤편에 초록색 천막 하나가 섰다. 어, 그 자리는 쓰레기통이 있는 자리인데? 당시 상점 뒤편에는 검은색의 철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대형 쓰레기통 (혹은 미드에서 많이 보이는 지하로 통하는 식료품 창고같이 생긴 그런 문. 역시 일찍이 힙했던 구반포!)이 있는 자리인데 저 자리에 뭐가 생긴다고? 

천막은 오픈형이 아닌 가림막을 갖춘 나름의 업소였다. 안에서는 커다란 철판에 밀가루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도로 쪽으로 난 바(Bar) 타입 좌석 몇 개를 갖춘 분식집이 생긴 것이다. 젊은 아저씨와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업고 있는 그보다 더 젊은 엄마가 꾸려나가는 이곳의 이름은 ‘녹색떡마차’. 현 애플하우스의 전신이다. 구반포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이 된 애플하우스는 세라네 집 동아상회 뒤에서 시작했다. 근처에 노상 떡볶이 가게나 분식집이 없었던 지라 녹색떡마차는 문을 연지 얼마 안되어 북적거렸다. 꼬맹이였던 나도 엄마가 사 와서, 혹은 친구와 함께 달달한 밀떡을 몇번 맛본 후 그 맛에 홀랑 빠졌다. 심지어는 녹지음악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혼자서도 들어갔다(인생 최초의 혼밥인가?). 

“아저씨, 떡볶이 100원어치 주세요.” 

“아, 100원어치는 안 되는데...(feat. 사장님의 난감한 표정).” 

“그럼 200원어치 주세요.” 

기억에는 떡 열 개와 오뎅 조금 파 조금이 나왔던 것 같다. 그릇은 당연히 녹색의 레트로 분식집 접시, 비닐은 꼭 씌워서. 훗날 세라에게 ‘그때 떡볶이 미니멈 가격이 200원이었더라’고  말하니 자기는 100원 어치도 살 수 있었다며, 주인집 딸 프리미엄 자랑 좀 해도 되겠냐며 으스댔다. 부럽고 분하다!

여튼 허름한 녹색떡마차는 시작은 초라했지만 날로 성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형 아파트 단지에 변변한 분식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 집이 이틀에 한 번꼴로 시켜 먹던 참새방앗간(‘장터국수’ ‘김가네’류의 분식 프랜차이즈)도 몇 년 뒤에 생겼으니 당시 떡볶이는 온리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어머니 손맛이 백종원이 아닌 이상(우리 엄마는 떡볶이를 잘 못 했다) 맛있는 떡볶이와 그보다 더 맛있는 오뎅 국물의 미식 경험은 오직 녹색떡마차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사장님, 아십니까? 사장님은 당시 구반포 어린이 및 청소년들의 입맛을 휘어잡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집은 딸이 셋이고 당시 언니들은 고1, 고2 였다. 국민학교 3학년에 올라간 나는 나름대로 공부 좀 하겠다고 웅진 아이큐를 구독 중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공문 수학은 나도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시켜줬다. 왜!!! (가질 수 없는 너 공문 수학에 대한 집착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6학년과 중학교 때 구독하게 된다.... 결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뒷북을 칠 뿐...)   

언니들의 시험 기간이 되면 엄마는 바빠졌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언니들의 야식을 준비했고, 나도 분위기 타느라 웅진 아이큐를 들고 와서 옆에서 꼬물꼬물 풀었다. 세 여식이 학문에 몰두하는 모습이 그저 뿌듯했던 엄마는 녹색떡마차에서 떡볶이, 순대, 오뎅을 자주 사 왔다. 동그란 상에 둘러앉아 분식을 노나 먹는 맛은 당연히 꿀맛이었다. 아마도 이 순간을 위해 응당 9시에 자야 하는 새나라의 어린이는 밀려오는 잠을 참고 버텼던 것 같다.  웅진 아이큐는 이용당했다... 

하지만 그곳을 엄마만 이용했겠나. 국딩인 내가 수시로, 그리고 한창 분식 좋아할 나이인 언니들이 더 자주 이용했기에 사장님은 딸 셋 있는 우리 집의 존재를 알았다. 당연히 세 딸의 보스인 우리 엄마의 얼굴도 기억했다. 그래서 사장님은 길에서 엄마를 마주치게 되면 꾸벅 인사를 드렸다. 나도 그 장면을 몇 번 목격했는데, 엄마는 단골 가게 사장의 아는 척이 민망했는지 늘 멋쩍게 반응했다. 

어느 날 우리 셋이 다 있는 자리에서 그러더라. “야, 사장님이 길에서 나한테 아는 척하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어. 떡볶이 좀 그만 사먹엇!” 하지만 엄마는 몰랐다. 매출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은 본인이라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창피하고 민망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어색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리 안면 있는 사람이래도 너스레 떨며 인사 나누는 넉살은 우리의 유전자에 흐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핀잔은 그저 멋쩍은 엄마의 아무말이 아니었을까.


P.S. - 녹색떡마차는 중간에 ‘길싸롱’이라는 상호변경을 거쳐, 몇년 뒤 바로 옆 L동 상가 1층으로 들어갔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세화여중고생들의 열렬한 지지와 버프를 받아 그로부터 얼마 뒤 2층, 지금의 애플하우스 자리로 확장했다. 그 곳이 언제부터 애플하우스가 됐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교 3학년 주일학교 뒤풀이로 갔던걸 기억하면 최소 1993년이다. 무침만두가 그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다. 애플하우스 하면 순대볶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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