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랄 일도 참 많았던 그 시절은 안녕
요새 10대 분들은 '헐' 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고 한다. 헐은 문자로 쓰이면 문장부호에 따라 세심하게 표현이 된다. 헐ㅋ (놀람+도도) 헐.. (놀람+무력) 또는 헐! (아주 놀람) 헐~(놀람 + 실망) 정도가 되려나. 그 어감이 꽤 온전하게 전달된다. 좀 더 귀엽고 방정맞은 유사어로 '헐랭' 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거의 안 보인다.
언젠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세 남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시던 60년대 생 아버지께서 "헐~" 이라고 우리를 따라 하셨는데, 그 연배의 음성과 말투에 녹아들기에는 무척 이질적인 소리였다. 헐이라는 소리를 뱉은 뒤 어쩔 줄 모르는 듯 요동치며 끝음을 처리하셨는데 아주 어색했다. 아버지의 헐을 듣고 나니 어쩌면 헐이라는 단 하나의 음절만큼은 밀레니얼과 그 인접 세대의 전유물인가 싶었다. 한국어를 배우다가 원어민처럼 보이는 쉬운 방법을 깨달았다며 "헐~ 대박!"을 남발하는 유학생 친구도 있었다.
왜 그토록 놀람의 표현이 보편화되었을까. 혹시 또래 문화가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웹과 모바일 전환을 겪으면서 상대적으로 놀랄 일이 많았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유년 시절에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정제된 정보를 주로 접했다. 종이신문, 브리태니커 백과, 비디오테이프 등에 컨텐츠가 담겨 한정적인 경로로 유통되었다. 그러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갑자기 다채로운 컨텐츠의 세상이 열렸다. 컨텐츠의 출처가 늘기도 했을 테지만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사소하지만 새롭고 자극적인 소재가 전파될 경로도 늘었을 테다.
소위 '엽기'류의 거칠고 강한 표현이 범람하였고 한 때 대중문화의 주류였다. 곧 피로해진 그 시절 표현 중에 특유의 순둥함으로 살아남은 말이 아마 헐~ 일 것이다. 닷컴 무렵 10대였던 이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면서 사회화가 되고 말 씀씀이도 고상해졌다. 그 와중에 헐 정도는 친근하지만 민망하지 않은 또래들의 언어로 살아남은 모양이다. 꽤 가볍지만 너무 유치하지 않게 미묘한 선을 잘 지키는 바로 그 말, 헐.
물론 지금의 청소년들도 놀람을 표현하는 밈이 존재한다. (상상도 못한 정체) ㄴoㄱ 라던가. 어쨌든 쉴틈없이 정보를 주고 받는 초연결사회에서는 놀람의 역치가 확실히 높아졌다. 새로운 소식과 정보가 이미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압도당할 만큼 대단히 놀랄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진 게 아닐까. 페북 친구인 어떤 아프리카 대륙의 소녀는 언젠가 한국을 꼭 오고 싶단다. 흥미롭게도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는 서울이나 제주가 아니라 대구. BTS 멤버가 졸업한 초등학교 앞의 문구점을 가봐야 한다고.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발자취를 쫓는 것이 마치 언젠가 고흐가 살던 집을 방문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닮았다.
다양한 사람과 연결되고, 하나의 문화가 더 넓게 퍼지고, 다양한 가치가 공유된다. 한 문화권에 갇혀있다가 바깥 세상을 만나 놀랄 일들도 조금씩 적어진다. 새로운 냄새가 들어오면 잘 구분되다가 차츰 후각이 둔해진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놀라운 소식이 한둘이 아닌데 일일이 호들갑 떨며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최근 한 살 터울의 우리 팀 동료 분께 헐의 종말을 고했다.
"그거 아세요? 요즘 청소년들은 헐이라는 말을 잘 안 쓴대요."
바로 날아오는 대답,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