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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l 10. 2022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일

명상의 나날


호기롭게 시작한 브런치에 소홀했다. 꾸준히 글을 써서 팔월 말부터 있다는 출판 지원 프로젝트에 지원해보는 것이 목표였는데, 복병을 만났다. 명상의 바다에 다시 한번 풍덩 빠졌다.


명상을 꾸준히 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의 여름이다. 당시 호주로의 워킹홀리데이를 한 달도 안 남겨놓은 때였는데, 막연한 세계로 무작정 떠난다는 데에 대한 불안이 설렘을 막 잠식하던 참이었다. 이미, 꽤 오랜 시간 직원으로서도, 학생으로서도 나를 봐온 스승님이 열흘 일정의 위빠사나 명상 리트릿을 추천해주셨다. 스승님을 따라 몇 번 짧은 일정의 명상 코스들을 적지 않아 따라다녔지만 아무래도 한 번도 마음에 쑥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필요로 한다고 여기지 않은 탓이다. 딱 한번, 한 해 전에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던 큰 실연을 당하고 며칠 스스로 마음을 내어 명상처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앉아지지를 않아 며칠을 그냥 멍하니 천장만 보다 왔다. 되려 명상 코스를 다녀오기 전인가, 후에 들렀던 막내 이모 댁에서 이모와 나눴던 대화가 그때 나보다 훨씬 크게 무너져 있던 이모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서도 두고두고 들었던 것이 그날들의 유일한 위로라면 위로였다.


선생님은 불안에 떠는 나에게 내가 이 미지의 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 이 코스를 잘 해내기만 한다면 앞으로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확언할 수 있는 세상일이 별로 없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선생님이 이때 내게 해줬던 이 권유야 말로, 세상에 확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 중에 하나라고 여긴다. 내가 실의에 빠진 누군가에게 명상을 권유할 때 역시 선생님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확신의 힘을 담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있다.


 코스를 마치고 마주한 세상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다시 한번  몸으로 세상에 나온 기가  것처럼 모든 생의 감각들이 예리하게  세워진 의식을 타고 무차별 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차오르게 아름다웠고, 동시에 차갑고 비정했다. 전과 달라진 것은, 확실히  안에 깊게 뿌리 박혀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없거나 낮아져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호주의 멜버른 근처 우리얄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인도의 이가푸리에서, 미얀마의 양곤에서, 한국의 전주에서, 캐나다의 심코에서 기회가 될때마다 재정비하며 계속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위빠사나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단단하게 이어져온 이 줄기는 내 삶의 척추와 같은 것이라서 내가 흔들릴 때 바르게 설 수 있는 중심이 되어 준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왜 글을 쓰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행복해서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대학교에서 예술을 전공하던 중간에 내가 길을 확 틀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현장에 나가기도 전에 만나본 현장 출신의 교수와 강사진을 보며 느낀 회의 때문이었다. 나 자신에게 그 사람들과 같은 성취를 이루고 싶냐고 물으면 분명 그렇다. 고 답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냐.라고 물으면 또 분명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내 불안을 증폭시키고 싶지 않았고 감히 말하건대 그들 상당수에게서 나와 닮은 불안을 보았다. 성취하고 싶고 이뤄내고 싶고 증명하고 싶은 불안들을 가까이에서 냄새 맡으며 동족임을 확인하는 것은 내게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아직도 불행을, 그에 쫓기는 일을 마치 예술가의 숙명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깊은 분노가 마음에 인다. 진짜 깊은 불행은 악세사리처럼 삶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자신의 일을 소소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몇 안 되는 분들에게서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평안을 맛볼 수 있었다. 일찌감치 내 길이 아니라고 나오기를,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욕망하는 것을 무거운 일이라 여겨 주저하는 내 여린 정신이 아마 그 세계를 쉽사리 벼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글을 쓰는 일은 좋다. 왜인지 별 손에 꼭 잡히는 것도 없이 지금까지 평생에 걸쳐 계속하게 되는 유일한 일이다. 다만 내가 조금 지치고 소통에 목말라 있을 때,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길 때 더 쓰기가 쉬워진다. 언젠가 파리 리뷰에 실린 작가들 인터뷰를 읽으며 그때 발견한 위대한 작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이 건강한 육체와 마음을 갖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틀거리고 어지러운 정신으로 살아야만 하고 살아져야 하는 때는 분명히 있지만, 오래 무던하게 쓰는 사람들은 그것이 일시적인 감각의 향유일 뿐 결코 긴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고요히 앉아 현재에 골몰하며 맺힌 감정을 풀고, 응어리를 쏟아내고 하다 보면 자연히  말이 점점 준다. 아마 명상을 깊게 알기 전에 글쓰기가 나에게 명상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명상을 계속해나가면서도 좋은 글타래를 엮어갈  있는 방향이 어딘가는 있을 거라 믿는다. 시소 놀이를 하는 것처럼  사이에 중심을 찾고 있는, 아니면 겹쳐지는 접점을 찾고 있는 년째 여전히 그런 와중인  같다.


그때까지는 최근에 나에게 계속해주고 싶은 말을, 나를 지키고 돌보는 혼잣말을 하는 걸로 만족한다.


지금 이미 충분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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