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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18. 2023

작가의 말

책을 볼 때 ‘작가의 말’을 먼저 본다. 나라면 무슨 말을 쓸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공동 저자로 책을 내게 되었는데 저자가 많아서 감사의 말이나 작가의 말을 쓸 공간이 없었다. 석사 논문을 쓸 때 드디어 ‘작가의 말’과 비슷한 ‘감사의 말’을 쓸 기회가 생겼다.      


논문을 시작할 때부터 감사의 말을 뭐라고 쓸지 구상했었다. 지도교수와 본인 밖에 안 본다는 석사 논문인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민망했다. 아쉽지만 박사 논문에 쓰기로 하고 생략했다. 작가 지망생이 되면서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궁금해졌다. ‘작가의 말’을 보며 작가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작가 지망생이 되면서 작가의 말을 쓰는 작가가 부러웠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작가로 ‘살고’ 싶다. 앞으로의 삶은 작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질수록 작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주변에 작가로 사는 사람이 없어서 ‘작가의 말’을 보며 혼자 유추해 보곤 한다.      


작가로 산다는 건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혹자는 글‘만’ 쓰는 작가는 되지 말라고 한다. 본업이 따로 있어야 오래 쓸 수 있다고 했다. 쓴 글로 돈을 벌지 않아도 작가로 살 수는 있다. 


내가 되고 싶은 작가는 좀 더 현실적이다.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취미가 아니라 글쓰기의 프로를 꿈꾼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그 일만 해도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프로 작가에게는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내 글을 읽어줄 누군가가 존재해야 한다. 


지금은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먼 길이다. 그냥 좋아서 하는 공부라면 박사과정까지 앞으로 3년 정도만 더 하면 된다. 정신분석가로 살고 싶다면 의무 사항은 아니라도 임상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가 되는 게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가든 정신분석가든 뭐든 빨리 되기를 바랐다. 어느 쪽이든 아무것도 아닌 채 있는 나보다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식어가 없는 나로서만 존재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지금 공부를 해야지 아무도 안 보는 이딴 글을 써서 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를 공부에 여유도 없는데, 돈을 써서 뭐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논문 마감기한에 쫓겨 정신없이 공부하고 쓰고, 고치고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해외에서는 작가이자 정신분석가로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작가와 정신분석가의 길은 상충하지 않고,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글 쓰는 시야가 확장되었다. 논문과 작가로서의 글쓰기는 다르지만 한 가지 주제로 긴 글을 만드는 행위 자체는 닮았다. 글을 쓰니까 정신분석을 공부할 때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이 되면서 연구 주제를 파고드는 데 도움이 된다. 


아직 작가의 말은 쓰지 못했지만, 더는 부럽지 않다. 억지로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시간은 내 편이니까. 작가든 정신분석가든 되지 못해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이보다 더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은 없기에 괜찮다. 언제일지 모를 ‘작가의 말’을 상상하며 글 쓰는 삶만으로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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