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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앨리스 이야기(2)

2화

그래, 나는 지수가 아니고 앨리스니까 좀 더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 앨리스는 ‘지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소피는 상담을 진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앨리스. 이제부터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하면 돼요. 이 시간만큼은 앨리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말하기 싫으면요?”

“그 또한 앨리스의 자유죠.”     


앨리스는 소피가 자신을 편하게 해 주려고 의례 하는 말이라 여겼다. 괜한 반항심에 도발하는 말을 했다. 

자신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다. 마음 한 켠에 경계심이 남았지만, 카우치가 편한 탓인지 한결 차분해졌다.      


“앨리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게 뭐에요?”      

“…악몽을 꿔요.”     


 앨리스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어떤 악몽이에요?”


“길을 못 찾고 계속 같은 곳을 뱅글뱅글 맴돌아요. 한참 헤매다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져요. 어딘지 모를 곳에 갇힌 두려움에 극심한 공포가 올라와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안 나와요. 같은 꿈을 계속 꾸니까 꿈인 줄 알다가도 너무 생생해서 이번에는 진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 속으로 소리치다가 겨우 깨요. 차라리 깨어나지 못하면 좋겠어요.”     


“그게 앨리스가 원하는 거예요?”


“...적어도 악몽은 끝나니까요. 꿈과 현실 중에 어느 게 더 악몽인지 모르겠어요.”     


소피는 앨리스의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상담 차트와 펜을 쥐고 있지만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피는 앨리스의 말을 눈빛에 담는 듯한 표정이었다. 앨리스는 소피의 눈을 보고 말할수록 계속 말하고 싶어졌다.      


“저, 여기 누워도 되나요?”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앨리스는 조금 어지러웠다.      


“얼마든지요. 카우치는 누우라고 있는 거니까요.”     


앨리스는 쿠션을 끌어안은 자세로 다리를 뻗고 누웠다. 자신의 침대보다 푹신했다. 졸린 듯 멍한 상태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상담사님.”

“소피.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요?”     


소피는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면 상담사의 권위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앨리스는 어색하게 소피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이었다.      


“소피. 제 탓일까요?”     


두서없는 질문에 소피는 뭐가 제 탓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앨리스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두었다. 앨리스도 소피의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닌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악몽을 꾸는 게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조금 편하게 살고 싶어요.”

“왜 벌을 받아야 하죠?”

“저는 벌 받아 마땅하니까요. 전남편의 비난대로 아기가 죽은 건 제 탓이에요. 결혼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나쁜 마음을 가지면 안 됐어요. 너무 미안해요.”     


앨리스는 아기를 유산하기 전에는 지금 같은 악몽을 꿔본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어떤 감정이 들어요?”     


소피는 악몽에 관해 묻는 대신 앨리스의 감정 상태를 질문했다.      


“너무 억울해요! 미안해도 우리 아기한테 미안하지 전남편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요? 왜 내가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해요? 살면서 충분히 고통받았는데, 잘못은 그놈이 했는데 꿈에서조차 내 몸도 왜 내 맘대로 못하냐구요!”     


소피의 질문에 다소 격앙된 목소리의 앨리스가 토해내듯 외쳤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벌 받아 마땅하다는 마음과 억울함, 둘 중 어느 것을 없애고 싶어요?”     


앨리스는 악몽이 지난날의 벌을 받는 거로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꿈에서 한마디 말도 못 하는 건 너무 억울했다.      


“잘 모르겠어요. 결혼 내내 고통받았는데 이혼하면 다 끝날 줄 알았어요. 왜 고통은 끝나지 않죠? 적어도 잠이라도 편안히 자고 싶어요.”     


앨리스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건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자는 것이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약을 먹지 않고 잠들어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24시간 뇌가 깨어 있는 기분은 대학생 때 각성제를 연달아 먹고 밤샘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앨리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잘 수 있어요. 꿈을 의식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힘을 빼고 누우면 돼요.”     


앨리스의 귓가에 소피의 음성이 나른하게 들렸다. 한바탕 뿜어낸 분노 뒤에 힘이 빠진 탓인지 경직된 몸이 절로 풀어졌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앨리스. 이제 일어나야죠? 시간이 다 되었어요.”     


소피가 깨우는 소리에 앨리스는 눈을 번쩍 떴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이상하게 개운했다. 카우치 탓인가. 눈을 뜬 앨리스는 무방비 상태의 모습이 민망한지 빠르게 일어나 앉았다.      


“선생님. 제가 잠들었나요? 벌써 시간이….”     


허둥대며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좀체 보여준 적이 없는 앨리스는 당황해서 소피를 선생님이라고 부른 줄도 몰랐다.    

  

“어때요? 악몽을 꿨어요?”     


소피는 앨리스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걸 안다는 듯 질문했다.      


아! 몇 년 만에 꿈을 꾸지 않았다. 깜박 잠들어서 그런가?  

    

“꿈을 꿀 만큼 긴 시간이 아니어서 악몽은 안 꿨어요.”     

“조금이라도 편히 자고 싶으면 언제든 오세요.”     


소피는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라색 털 슬리퍼가 나풀거렸다. 앨리스도 마주 일어나 “전화하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다음 만남을 정하지 않은 채 상담실을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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