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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앨리스 이야기(3)

3화

앨리스가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 지는 벌써 2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반신욕도 해보고,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고, 적당히 땀 흘리는 운동도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참다못해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수면제를 먹으면 숙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은 들었다. 


문제는 여지없이 악몽을 꿨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계속 같은 곳을 헤맸다. 평소 길치라서 초행길을 헤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길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고 헤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앨리스는 자신의 꿈에서 너무 무력했다. 지난 결혼처럼.     

이건 꿈이라고 자각해도 깨지 않았다. 영원히 헤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힌 듯 입만 벙긋하다 겨우 “아! 아!” 소리를 냅다 지르다 깬다. 온몸이 물 먹은 스펀지처럼 축 처져서 다시 움직이려면 한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알람 소리에도 일어날 기운이 없어서 생전 하지 않던 지각을 하기 일쑤였다.      


앨리스는 악몽을 꾸느니 차라리 잠을 자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자란 잠은 주말에 수면제를 먹고 몰아서 잤다. 잠을 자지 않고 버티다 한두 시간 정도 쪽잠을 자는 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자신에게 남은 건 직장밖에 없는데 그마저 잃을 수는 없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좋아해서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만족했다. 사람에 치이는 건 여느 직장이나 매한가지지만 책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하다 졸리면 빈속에 카페인을 부어 넣고, 점심시간에 눈을 붙였다. 점심을 먹으면 포만감에 오후에 더 버티기 힘들었다. 점심도 거르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앨리스를 보고 직장 동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헬스장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서관의 지하 서고에 숨어서 웅크리고 잤다. 한동안은 견딜 만했다. 악몽이 점점 자라나기 전까지는.    

 

앨리스가 무작정 버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도 하고 수면제와 우울증약도 처방받았다. 처음에는 차도가 있어 보이더니 그때뿐이었다. 의사는 “오늘은 좀 어떠세요?”라는 의례적인 질문과 약 처방만 할 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심리상담도 받아봤다. 자꾸 어린 시절 얘기를 들춰내길래 두어 번 가다 말았다. 필요할 때만 수면제를 먹고 버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오다가 몇 달간 기획한 도서관 행사가 마무리된 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 행사 책임자인 앨리스는 수면 부족과 과로가 겹쳐 행사가 끝난 뒤 팀장에게 보고서 결재를 받으려고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앨리스의 동생 희수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앨리스는 절대로 가족을 부르지 않는다. 기절한 새 팀장이 인사기록부를 보고 부른 모양이다.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깨어난 앨리스를 보자마자 희수는 한숨 섞인 타박을 늘어놓았다.      


“언니, 벌써 몇 년째야. 이제 자신 좀 그만 괴롭혀!”

“뭐하러 왔어.”     


앨리스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짓 모른 체했다. 희수도 차마 자신의 입으로 콕 짚어 말할 수 없어 말을 돌렸다. 


“여기 한번 가 봐.”     


희수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뭔가를 가방에서 꺼내 힘없이 늘어진 앨리스의 오른손 위에 올려놓았다. 보라색이 눈에 띄는 명함이었다. “Sophy’s Couch(소피의 카우치). 세상 모든 것에 관한 상담소”라고 쓰여 있었다.   

   

“뭐야 이게. 상담소는 안 가. 별 소용 없어.”     


명함을 힐끗 본 앨리스의 거절에 희수는 “여긴 다르다”라며 어디서 들었는지 일장 연설을 해 댔다. 언니보다 야무지다는 어머니의 말대로 희수가 과대광고에 넘어갈 애는 아니다.      


“상담소는 뻔해. 그리고 뭐? 세상 모든 것에 관한 상담이라니 무슨 흥신소도 아니고.”     


시니컬한 말투는 여전해도 언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곁에서 지켜본 희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떤 고민도 다 들어주고, 상담만 하는데 백발백중 고통이 없어진대.”     


무슨 마약도 아니고, 말이 돼? 그럼 내 악몽도 가져가 줄 수 있어?      


앨리스가 차마 이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별말을 하지 않자 희수는 얼른 명함을 앨리스의 가방에 넣었다. 같이 있어 준다는 희수를 거절하고 앨리스는 혼자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주말이고 다음 주까지 병가를 냈으니 수면제를 먹고 자도 된다. 자다가 악몽을 꿔도 혼자 사는 집이니 마음껏 소리 지르고 미친 짓을 해도 괜찮다. 앨리스는 또 악몽을 꾸면 미친년처럼 맘껏 난리 쳐 보리라 단단히 벼렸다. 


도서관 사서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앨리스는 도서분류표처럼 뭐든지 항목별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2년 전, 이혼 후 그녀의 삶은 미분류항목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다. 정돈된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조짐은 그 전부터 있었다.      


3년 전, 아기를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앨리스의 전남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가해자로 내몰았다. 혼자가 된 후 전남편의 언어폭력에서 벗어났지만, 이혼 후유증으로 불면증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늦어도 밤 11시에 잠들어 아침 7시에 칼같이 일어났다. 불면증은 앨리스 인생 최대의 혼돈 그 자체였다. 불면증과 함께 따라오는 악몽은 사방에서 그녀를 옥죄어 와 숨이 막혔다.      




지난주 금요일에 쓰러진 후로 앨리스는 평소답지 않은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예약한 병원에 가지 않았고, 생각지 못한 장소에 와서 소피와 첫 상담을 했다. 카우치에 누워서 잠이 들어버렸으니 효과가 있는 건가. 앨리스는 당황스러워 다음 예약도 잡지 않은 채 나와버렸다. 


앨리스는 소피의 카우치를 나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걸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오늘 밤은 잘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평일 한낮의 햇살을 만끽하는 게 얼마 만이던가. 선글라스를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데 너무 눈부시다. 악몽의 어둠 속에 살다가 잠깐 탈출한 기분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직장 관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니까 말을 안 듣더니, 겨우 몇 푼 벌겠다고 나대더니 사람 귀찮게 오라 가라야!”     


또, 같은 꿈이다. 간만의 평일 외출이 피곤했는지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앨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유산하던 날 병원에서 전남편이 한 말이 가시로 박혀 빠지지 않는다. 그와 사는 동안 가시가 되어 박힌 상처는 너무 자잘해서 전신에 박힐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가시를 뺄 엄두도 못 냈다.


너무 분하면 말문이 막힌다던가. 전남편의 가시 돋친 말에 손을 부르르 떨 힘조차 없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꿈에서는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하지 못했다. 앨리스는 대신 전화기로 손을 뻗어 다음 예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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