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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앨리스 이야기(4)

4화

소피의 카우치 두 번째 세션.    

 

소피는 지난번과 같은 차림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만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소피가 앨리스를 보는 눈빛이 좀 더 친근해진 걸 제외하고는 잠이 들었던 카우치와 애착인형 닮은 쿠션까지 그대로다.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야 하나요?”

“앨리스가 하고 싶다면요.”     


앨리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꺼낼 거라 예상했다. 상담사들은 문제를 단순화하려고 꼭 단골 멘트로 어린 시절을 소환하는 경향이 있다. 시험 삼아 건넨 말인데 소피는 예상과 달랐다. 앨리스의 질문에서 거부감을 감지한 소피는 재촉하지 않았다.   

   

“길을 헤매는 악몽 말고 병원에서 전남편을 만난 일을 꿨어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너무 생생했어요. 바보같이 말 한마디 못하는 것까지.”      


앨리스는 남 얘기하듯 자신을 비하하는 투로 말했다. 상처뿐인 결혼에서 임신하면 부부 관계가 회복될까 기대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비웃었다. 그토록 바라던 임신은 남편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벌어진 뒤에 찾아왔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남편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임신은 합의 이혼에서 양육권 소송으로 바뀌는 귀찮은 절차에 불과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앨리스를 극심한 스트레스로 몰아갔다.      


임신 5개월 차에 갑작스러운 하혈로 병원에 간 날, 아직 남편 신분인 그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짐을 싸서 나가버린 남편은 앨리스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수술을 해야 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병원에서 대신 연락해서 겨우 연락이 닿은 남편은 대놓고 마지못해 온 티를 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남편은 병상에 누운 앨리스를 보자마자 비난했다. 차라리 격렬하게 싸우거나 그가 집을 나가던 날 꿈을 꾸는 게 낫지 왜 하필 유산하던 날 꿈이 반복될까. 꿈조차 제 편이 아니라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할 수 있다면 남편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     


소피의 질문에 상념에서 깨어난 앨리스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할 거 같아요.”

“전남편이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 거 같아요?”

“... 어차피 내 말은 듣지 않으니까 계속 비난하겠죠.”

“그래서 침묵을 택한 건가요?”     


소피의 질문에 정곡을 찔린 앨리스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제가 무기력하게 대응했냐고 비난하는 건가요?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남편이 갈수록 낯선 타인이 되는 게 두려웠어요. 원래 아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악몽처럼.”     


“전남편이 미안하다고 한 적이 있나요?”

“그놈이 퍽이나요!”     


앨리스는 소피가 뭘 잘못 먹었느냐는 듯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전남편에게 바라는 게 있어요?”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냥 내 꿈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꿈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달라질 거 같아요?”

“그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겠죠. 모든 게 정상이던 때로.”

“정상이라. 어떤 게 정상이죠?”     


그걸 몰라서 물어? 앨리스는 소피가 또 말장난하는 거라 여겼다.      


“당연히 악몽을 꾸지 않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거죠.”

“앨리스가 아니라 지수로 돌아가는 걸 의미하나요?”     


앨리스는 바로 대답을 하려다 멈칫했다. 처음에 앨리스가 되었을 때 지수가 아니어서 좋았다. 지금 나는 결혼 전의 지수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게 어떤 거지? 가능하긴 한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도 변했는데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겠죠.”    

 

소피는 앨리스의 대답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군요. 앨리스. 다음 시간까지 과제를 하나 내줄게요.”

“과제요?”


“마침 이번 주가 휴가라고 했죠? 앨리스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지금 하는 거예요. 앨리스에게 상처 준 사람을 다 만날 수는 없으니 가장 힘들게 했던 전남편부터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 보세요.”

“전남편을 만나라고요?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이혼하고 전화번호를 바꿨어요. 그 뒤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남 일이라고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 아녜요? 그렇게 쉽게 될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소피는 앨리스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앨리스가 버리고 싶은 것을 자필로 써 보세요. 다음 만남까지 없애고 싶은 감정, 기억, 사람 그 어떤 것이든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꼭 자필로 써야 하나요?”


앨리스는 깔끔하게 타이핑된 문서에 익숙했다. 손글씨를 쓴지 너무 오래되어서 글씨를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다.     


“나한테 검사받는 거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쓰면 돼요. 단, 구체적으로 써야 해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메모한 걸 가져오면 되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운 건 아닐 거예요.”     


“다음 시간에 안 올 수도 있잖아요?”     


앨리스는 고객을 유치하는 수법이 아닌지 다시 의심이 생겼다. 소피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다음 시간이 되면 알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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