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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쥰 이야기(1)

5화

미영은 ‘소피의 카우치’를 몰랐다. 

일하던 출판사에서 마지막으로 작업한 책과 관련된 자료 수집 때문에 작가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놓았을 뿐, 통화한 적이 없다. 아무리 난독증이라지만 ‘소망 치과’를 ‘소피의 카우치’로 착각하다니 말도 안 된다. 하필 핸드폰에 ‘소망 치과’와 ‘소피의 카우치’가 나란히 저장되어 있어서 더 헷갈렸다. 누구나 한 번쯤 할 법한 실수지만 미영은 실수로 넘기기 어려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난독증 같은 증상으로(편의상 난독증이라고 하자) 다니던 출판사를 관둔 상태라 사소한 실수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말이 관둔 거지 사실상 잘린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영이 다닌 출판사에서 교정 교열의 실수로 인한 인쇄 사고는 최종 담당자 책임이었다. 저자 이름을 잘못 표기해서 전량을 폐기하고 다시 찍어야 하는 대형 사고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석 달 치 감봉을 택하던가 아님.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지라는 사장의 통보에 사무실 짐도 안 챙기고 그길로 나와버렸다.     


원래는 다니던 치과에 스케일링을 예약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 “어서 오세요! 소피의 카우치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대로 “잘못 걸었습니다”라고 끊으려는데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저, 거기가 뭐 하는 덴가요?”     


이런 질문이 익숙한지 상대방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답변을 늘어놓았다.      


“네, 소피의 카우치가 처음이시군요? 세상 모든 것에 관한 상담소입니다. 어떤 고민이든 들어드립니다.” 

    

어떤 고민이든 된다고? 어쩌면 ‘소망 치과’ 대신 ‘소피의 카우치’에 전화한 것도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자신을 이끈 게 아닐까. 미영은 판타지 소설에 너무 심취한 자신을 반성하며 섣부른 기대를 경계했다. 마침 묻고 싶은 것도 있다. 정신과 의사와 다른 답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잘못 전화한 김에 바로 방문 예약까지 했다.      


미영은 아무리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도 자기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는 주의였다. 난독증이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터였다. 이제는 난독증 문제가 시급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처음 난독증 같은 증세를 보였을 때 과로로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 줄 알았다.      


미영의 증상은 점점 심해져 사소한 실수가 판을 새로 찍어야 하는 대형 인쇄 사고로 커졌다. 신입 때도 하지 않던 실수를 입사 5년 차에 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장한테 혼이 나고 시말서를 쓰는 건 둘째치고, 앞으로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컸다. 이대로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피의 카우치 첫 방문일. 

미영은 왠지 면접을 보러 가는 것처럼 약간 긴장됐다. 진짜 면접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정장 차림을 한 자신을 현관 거울로 보고 다시 들어와 청바지에 후드 티로 갈아입었다. 너무 편한 차림인가. 옷차림이 편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이대로 입기로 한다.   

   

미영은 난독증 때문에 초행길을 잘못 들어설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예전 직장에서 외근을 자주 하던 곳과 가까웠다. 지도 앱이 가리키는 위치에 선 미영은 빨간 대문을 한 벽돌 건물이 낯익었다. 근처에서 외근 후 무심코 지나가던 곳이다. 항상 커피 향이 솔솔 배어 나와서 카페인 줄 알았다. 카페를 가는 기분으로 입구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앨리스가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결국, 찾는 걸 포기하고 비상구 계단에서 반 바퀴 돌았을 때 바로 4층이 나왔다. 미영은 난독증이 심해져서 숫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상태 때문에 이곳이 이상하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소피의 카우치’ 앞에 서자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고 화원 같은 내부가 펼쳐졌다. 앨리스가 본 장면이 꿈이 아닌 걸 말해주듯 나비 한 마리가 미영을 마중 나왔다.      


뭐지? 난독증 때문에 헛것이 보이나?     


미영은 난독증이 생긴 후로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자기 탓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로비가 넓은데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성거렸다.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의 안내원이 곧장 소피에게 안내해 주었다. 좁고 긴 복도를 지나는데 방문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보라색 아치형의 문 앞에 ‘Sophy’라고 쓰여 있었다. 


안내원은 노크도 안 해주고 예의 바른 미소만 지으며 가 버렸다. 미영은 노크하려다 멈칫했다. 왠지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신의 세상이 더 복잡해 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노크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작가 지망생다운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똑. 똑. 똑.     


긴장한 탓인지 손가락 마디를 직각으로 꺾어 노크를 세게 하는 바람에 문과 부딪친 뼈마디가 아팠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처음 인사가 전부 “어서 오세요”로 통일하나보다. 

미영은 너무 환영받는 듯한 느낌이 어색해서 쭈뼛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소피가 서 있어서 순간 당황했다. 소피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웨이브 머리에 군데군데 작게 땋은 머리 장식이 마치 인디언 부족을 연상케 했다. 옷차림도 집시 스타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펑퍼짐한 원피스에 목걸이며 팔찌, 귀걸이까지 뭐 하나 튀지 않는 게 없었는데 묘하게 조화로웠다. 미영은 옅은 팔자 주름만 아니면 2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활기찬 에너지를 내뿜는 아담한 체구의 소피를 보며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자신이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반가워요! 나는 소피라고 해요. 쥰 맞죠?”     


쥰은 미영이 습작할 때 쓰는 필명이다. 얼떨결에 방문 예약을 하면서 그만 본명 대신 필명을 알려주고 말았다. 여기에 진짜로 올 줄 몰랐기 때문에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아, 저 사실 제 이름은 쥰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혹시 본명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괜찮아요. 오히려 환영이에요. 여기서는 본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을 쓰거든요. 오기 전부터 아주 잘했어요!”      


미영은 회사에서 잘린 후로 계속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난데없이 칭찬을 받으니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은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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