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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쥰 이야기(2)

6화

쥰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난독증으로 다니던 출판사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사표를 낸 지 정확히 석 달 만에 소피를 만났다. 나중에 가서 난독증이 자신에게 벌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는 걸 깨닫지만 지금은 인생 최대의 재앙일 뿐이다.      


소피는 쥰에게 악수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쥰은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소피의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에 맺힌 땀이 신경 쓰였다. 소피는 그런 그녀의 마음에 화답하듯 한 번 더 힘주어 맞잡은 손을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 손으로도 어찌나 힘이 센지 두 손을 맞잡은 쥰이 앞으로 딸려오는 자세가 되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피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만 보면 여기가 상담소가 아니라 무슨 신나는 파티에 온 줄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들떴다.     


쥰은 소피의 분위기에 휩쓸리다가 다시 침울해졌다. 분위기 변화를 감지한 소피가 말없이 손짓으로 카우치를 가리켰다. 쥰은 대자로 뻗어도 될 만큼 넓은 카우치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소피는 방문 색깔과 같은 보라색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내가 너무 들떴네요. 쥰을 보니까 왠지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눈치네요?”

     

소피는 쥰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일로 왔냐?”, “무엇을 도와줄까?” 따위의 뻔한 말 대신 궁금한 걸 질문하라고 했다. 쥰은 뜸을 좀 들이다가 물어보는 게 나을지 고민했는데 소피의 말이 반가웠다.      


“선생님, 저…. 질문이 있긴 한데요.”

“소피. 선생님 말고 소피에요. 여기선 소피와 쥰. 우리 둘 외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으니까 편하게 해요.”


“저, 소피. 제가 비정상인 거죠?”     


쥰은 찾아간 병원마다 자신이 비정상인지 물어보았다. 의사마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약을 먹고 지켜보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쥰은 29년 동안 모나지 않게 보통의 삶을 남들처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을까 봐,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자신의 특이함을 평범함으로 감추려고 했다. 그렇게 애쓴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난데없이 난독증이라니. 자기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소피는 쥰의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으로 돌려주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네, 저는 중요해요. 그동안 정상으로 살았는데 갑작스러운 난독증 때문에 비정상이 되었어요. 제가 비정상이라니. 견딜 수가 없어요!”     


소피는 쥰의 말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      


“만약에 지금 난독증이 있는 상태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요? 그래도 예전으로, 소위 말하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난독증이 있는데 행복할 리가 없잖아요?”     


쥰은 소피의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난독증이 있는 비정상인 상태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난독증인 상태로 뭘 할 수 있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예전에 난독증이 없는 상태일 때는 행복했나요?”

“지금보다는 나았죠.”     


쥰의 대답에 소피는 좀 더 정확한 답을 듣기 위해 다시 한번 질문했다.      


“지금보다 나은 상태가 꼭 행복한 상태인 것만은 아니죠. 쥰은 행복했어요?”     


불행하지 않으면 그게 행복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쥰은 소피의 질문을 듣고 나니 그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라는 자각이 들었다. 즉시 방어적인 태도가 되었다.      


“꼭 행복해야 하나요? 행복하게 살지 않아도, 적어도 불행하지만 않으면 충분해요. 자꾸 말 돌리지 마시고 제 질문에 답부터 해주세요.”     


곤란한 질문에 말 돌리기 수법이야말로 정신과 의사가 잘하는 수법이다. 쥰은 그 전부터 이 수법에 익숙했다. 쥰의 예전 직장 사장은 연봉 협상 얘기만 나오면 “출판 업계가 위기”라는 단골 멘트와 급하지도 않은 업무를 들먹이며 말 돌리기의 진수를 보였다.      


“좋아요. 쥰은 한마디로 규정 짓기를 원하는군요. 그렇다면 말해주죠. 쥰은 비정상이 아니에요.”     


비정상이 아니라니, 쥰은 소피의 말을 믿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소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규정짓는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건 비정상이에요.”     


쥰은 소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았다. 

결국, 내가 비정상이라는 거야 뭐야.      


“그럼 쥰이 원하는 게 소위 말하는 정상이 되는 건가요?”     


쥰이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소피가 물었다.      


“당연히…. 비정상이니까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치료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군요. 그럼 쥰이 원하는 정상은 어떤 거죠?”     


쥰은 답답했다. 왜 자꾸 자신에게 질문만 하는 걸까. 답을 모르니까 상담소에 온 거 아닌가. 가슴이 답답해져 경직된 자세가 점점 풀어졌다. 카우치에 눕고 싶은 유혹이 간절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빠져 카우치에 거의 눕는 자세가 되었다.      


“... 잘 모르겠어요. 소피님이 알려주세요.”

“그냥 소피면 충분해요.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없어요. 쥰이 원하는 정상이 뭔지 정확하게 알아야 도와줄 수 있어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다음 시간까지 찬찬히 생각해 봐요.”

“다음 시간에도 오라고요?”     


쥰의 오늘 상담은 다분히 즉흥적이라 언제까지 상담을 받을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백수라서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다.      


“비용이 부담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중요한 건 쥰이 원하는 정상이 뭔지, 정말로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 이유를 찾는 거예요. 나에게 오지 않아도 좋으니 꼭 한 번 생각해 봐요. 자신을 위해서.”     


소피는 어쩌면 쥰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중요한 화두를 가볍게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쥰은 미션 수행자가 된 심정으로 소피의 카우치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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