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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쥰 이야기(3)

7화

쥰은 소피의 카우치를 나와 자신이 원하는 ‘정상’이 뭔지 생각에 잠겼다. 스트레스 때문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때가 있지만 일시적이었다. 편집자로서의 읽기 말고, 읽고 싶은 책을 독자로서 맘껏 읽거나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독증 같은 증상도 일시적일 거라 여겼다. 워낙 작은 출판사라 간단한 교정 교열은 쥰이 직접 볼 때가 많아서 항상 눈이 침침했다. 낮에는 출판사 에디터로 남의 글을 편집하고, 밤에는 작가 지망생이 되어 자신의 글을 쓰는 생활이 몇 년간 계속되었다. 손목터널증후군이나 목, 허리 디스크는 업무상 재해 같은 거지만, 난독증이라니 어이가 없다. 난독증은 어릴 때부터 증상을 보인다는데 쥰은 글자 신동으로 불릴 만큼 말보다 글자가 편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흩어져도 글은 흔적을 남긴다. 쥰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 날 종일 스케치북에 썼다. 글자로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여전히 말보다 글자가 편한 쥰은 작은 출판사의 에디터가 되었다. 퇴근 후에는 자신의 글을 썼다. 쓰려고 애썼다.     

 

마감에 쫓겨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에 인쇄소를 쫓아다니며 서점 가판대에 새 책이 깔리는 순간 보람은 잠시,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마감이 기다렸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입사 첫날의 포부는 금세 사라졌다.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월급이 나왔다. 내 회사도 아닌데 내 일처럼 일해야 할 만큼 가‘족’같은 회사였다. 

맨날 “출판 시장이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장 때문에 연봉 협상은커녕 야근 수당은 꿈도 못 꿨다.      

에디터 경력 5년 차, 29살의 쥰은 남의 글만 다듬다가 20대를 다 보내는 건 아닌지 점점 초조해졌다. 첫 직장인데 이대로 계속 다녀야 하는지 회의감이 몰려왔다. 출판사에서 일하면 작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무너진 지 오래다.    



  

쥰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신호는 점심을 먹지 않게 되면서부터다. 일에 대한 회의감이 계속 들면서 점심시간이 되면 무작정 회사 건물을 벗어나 걸었다. 여직원이 많은 작은 출판사라 도시락 모임이 있는데 쥰도 멤버였다. L 팀장은 쥰이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아 밖에서 먹고 오는 줄 알았다. 여느 때와 같은 점심시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쥰을 팀장이 불러 세웠다.      


“박대리! 점심도 안 먹고 어디가?”

“아, 팀장님. 아침을 먹었더니 입맛이 없어서요.”     


쥰은 팀장의 물음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 대려다가 말았다.      


“나도 그런데. 그럼 나랑 커피 한잔할래?”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던 쥰은 입사 때부터 사수였던 팀장에게만은 고민을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탕비실은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있고, 근처 카페는 회사 사람과 마주칠 우려가 있어서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회상 옥상으로 갔다. 한창 원고 편집하다가 눈이 뻑뻑하면 바람을 쐬러 올라오던 곳이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말수도 줄어들고. 점심시간에도 자꾸 사라지고. 혹시 스카우트 제의 받은 거야?”     


L 팀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쥰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슬럼프인가 봐요.”

“박 대리가 몇 년 차지?”

“횟수로 5년 차에요.”     


팀장은 쥰의 연차를 계산하다 그녀의 첫 입사일이 생각났다. 사회 초년생다운 긴장감과 어색한 자세를 뛰어넘는 반짝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5년이라. 슬럼프가 올 때도 됐지. 늦은 편인가? 원래 박대리 꿈이 작가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도 글 써?”

“쓰고 있기는 한데 진전이 없어요. 일도 꿈도 다 좀 그러네요.”     


쥰의 힘없는 대답에 팀장은 쓴 글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15년 차 출판사 편집자의 시각으로 한번 봐주겠다고 했다. 쥰은 진작에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좋은 기회다 싶었다. 전문가를 가까이 두고 멀리서 해답을 찾고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타인의 평가가 얼마만큼 독이 되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     




그 후 똑같은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시작은 자잘한 인쇄사고였다. 주문서를 잘못 입력한다거나 엉뚱한 저자에게 업무 메일을 보냈다. 결정적으로 담당한 책의 저자를 잘못 입력하는 대형 사고를 쳤다.      

쥰도 할 말은 있다. 이번 작가는 SNS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인데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심리, 힐링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자칭 ‘영성 지도자’라서 일반인보다 상식적인 줄 알았는데 완전 관종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표지에 쓸 사진을 바꾸고,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겨우 마무리 단계에서 이번에는 자신의 예명이 아니라 본명을 쓰겠다고 우겼다. 본명으로 책을 내면 작가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쌩 신인이라 팔릴 리가 없다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다행히 알아듣더니 마지막 교정을 넘기는 날 밤 10시가 넘어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이름으로 나가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예명도 함께 표기해 주세요.”라며 온갖 이모티콘을 덕지덕지 붙인 메시지를 보내 사람 속을 뒤집어 놨다.      


쥰은 저자명에 예명을 빨간 펜으로 박박 긋고 본명과 함께 예명을 괄호로 넣어 표기했다. 무사히 원고를 넘기고 최종 인쇄 감리까지 봤다. 출판한 책이 서점에 깔리는 걸 확인한 뒤 그 관종 인플루언서가 전화를 걸어 난리 칠 때까지 바로 다음 책 마감에 매달려 있었다. 


처음엔 책이 나와서 인증샷을 올리는가 보다 했다. 연달아 울리는 메시지와 함께 전화가 걸려왔을 땐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쥰은 전화를 받지 않고 그 전에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체 이게 뭐죠? 누가 낸 책이라는 거에요? 미친 거 아니야?!     


예의 없는 메시지는 무시하고 함께 보낸 사진을 확대해 보니 제 눈을 의심했다. 저자 이름이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원래는 본명인 ‘나 강주’를 쓰고 예명인 ‘직관의 숲’을 괄호 안에 넣기로 했다. 최종 인쇄된 책에는 저자 이름이 ‘나관종(강직의 숲)’으로 되어 있었다. ‘관종’은 쥰이 속으로 저자를 욕할 때 부르던 별칭이었다. ‘직관’과 ‘관종’이 난독증으로 헷갈린 건 그렇다 쳐도, 본명을 아예 관종이라고 한 건 도저히 실수로 보기 어려웠다.      


쥰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만 심해지는 난독증 때문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하던 차였다. 사장은 회사가 힘들 때는 가족같이 생각하라더니 출판 사고를 쥰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그녀는 미리 주머니에 넣어 간 사표를 던지고 짐은 택배로 보내라는 마지막 일갈을 남긴 후 나와버렸다.  

    

퇴근 시간 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쥰은 걸으며 핸드폰으로 ‘난독증, 정신과’를 검색했다. 몇만 개의 검색 결과 중에 자신과 같은 사례는 없어 보였다. 고민 끝에 찾아간 정신과에서도 뚜렷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성인 ADHD가 있으면 난독증과 같은 증상을 보일 수 있다는 애매한 소견과 함께 약물치료를 병행했다. 

그렇게 쥰은 공식적으로 ‘비정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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