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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쥰 이야기(4)

8화

소피의 카우치 두 번째 세션.     


쥰은 원래부터 두 번째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피를 만났다. 소피도 쥰이 다시 올 줄 안 사람처럼 악수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쥰! 생각해 봤어요?”     


소피는 친절하지 않았다. 여느 상담사처럼 단계별 접근이라거나 천천히 관계를 형성하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게 편했다. 자신을 문제가 있는 사람, 고쳐야 하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서 좋았다. 소피가 다짜고짜 한 질문의 의도가 뭔지 아니까 괜찮았다.     


“네. 생각은 해 봤는데…. 막상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음…. 쥰은 작가니까 비정상을 글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거 같아요?”

“글쎄요. 일단 난독증 때문에 글을 못 쓰겠어요. 단어를 잃어버린 느낌이에요. 입안에서 맴도는데 그게 뭔지 생각이 잘 안 나거나 아님. 쓸 수가 없어요.”     


쥰은 작가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이라고 고쳐 말하려다 말았다. 여기서는 박미영이 아니라 쥰이니까.      


“그럼, 난독증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하죠! 저는 난독증이 아니었으니까요.”

“쥰이 원하는 게 난독증을 없애는 건가요?”     


쥰은 답답했다. 지금까지 뭘 들었단 말인가. 난독증 때문에 직장에서 잘리다시피 하고, 글도 쓸 수가 없다. 정신과에 가도 소용이 없다. 심리적인 문제인가 싶어서 상담도 받아봤지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피. 제가 그럼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여태껏 그것도 몰랐어요?”     


소피는 쥰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질문했다.      


“쥰. 난독증만 없으면 정상이 되나요? 만약에 원래 비정상이 정상이라면요?”     


쥰은 소피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독증 때문에 이제 이해력에도 문제가 생겼나?


비정상이 원래 정상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여기가 무슨 판타지 세계도 아니고, 그럼 세상 사람들이 비정상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소피는 자신보다 더 비정상 같다. 

속으로 실망한 쥰은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소피는 딱히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쥰. 난독증이 나답게 해 주는 기회라면요? 난독증으로 잃은 것도 있지만, 해방된 것도 있을 텐데요?”     


어깨에 가방을 메려다 멈칫한 쥰은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들켰다. 소피는 쥰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재촉하지 않았다. 쥰은 다시 가방을 카우치에게 내려놓고 소피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실, 직장을 관둘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작가 지망생으로 살아야 할지, 데뷔는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난독증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 상태로 고통받으며 불행하게 살았겠죠. 지금도 썩 행복하진 않지만요.” 


“좋아요. 거기서 부터 시작해 보죠. 난독증의 시발점이 직장 같은데 출판 사고를 내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쥰이 난독증 때문에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기 전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에 사수인 L 팀장이 먼저 면담을 제안했다. 자신의 글을 봐주겠다는 팀장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보여준 게 실수였을까. 온라인상에서 글을 발표한 적은 있지만 아는 사람에게 감평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글을 출판 전문가인 팀장에게 보여주었을 때 내심 기대했었다. 이대로 출간 제의를 받으면 어쩌지.      


섣부른 기대는 다음 날 바로 깨지고 말았다. 쥰은 출근할 때부터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글을 봤는지 어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단편 소설 2편과 장편 소설 시놉시스를 보냈다. 어제 점심때 옥상에서 얘기를 나눈 후 내친김에 바로 작품을 보내서 부담스러웠나. 바빠서 아직 볼 겨를이 없었나 보지. 쥰은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팀장은 약속이 있다며 말을 걸 새도 없이 나가버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바쁘시죠? 저…. 제가 드린 글은 읽어보셨어요?     

아아…. 그거. 이따 말하려고 했는데. 보긴 봤어. 근데…. 아냐 이건 메시지로 하긴 좀 그렇고 잠깐 커피 타임 하자.      


쥰은 팀장이 업무상 무리한 부탁을 할 때 꼭 저렇게 말한다는 걸 안다. 초조해졌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무리 각오를 해도 각오가 되지 않았다. 쥰은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옥상에서 기다렸다. 전화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쥰의 얼굴을 보고도 계속 통화하던 팀장은 얘기가 길어지는지 “그래, 이따 통화하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어. 미안. 전화가 와서.”

“아, 괜찮아요. 바쁘신데 괜히…. 죄송해요.”

“뭐, 선배 노릇 하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후배가 요청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따지고 보면 팀장이 먼저 작품을 봐주겠다고 해놓고 엄청난 호의를 베푼 모양새다. 쥰은 팀장의 평가를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어제 집에 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봤는데 말이야. 음…. 뭐랄까 글의 설정은 흥미로웠어. 근데 어디서 좀 많이 본 거 같더라고. 내가 판타지물은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데 설마 표절은 아니지?”

“네? 아뇨!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설정에 클리셰가 있긴 하지만 내용은 전부 제가 창작한 거예요.”     


쥰은 팀장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표절이라니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 그래? 뭐 박 대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네네. 저 팀장님 그게 단가요?”

“응? 편집자로서 한마디 하자면, 이런 건 냉정하게 말해야 헛된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박 대리는 작가보단 편집자로서 자질이 더 뛰어난 것 같아. 글은 취미로 쓰는 게 어때? 요즘 SNS 많이 하잖아? 유명세가 있어야 책을 내도 팔리는 거 잘 알잖아?”     


쥰은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팀장은 또 전화가 걸려와 먼저 내려가고 혼자 남았다. 팀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화가 났다.     

 

표절이라니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가 있지? 다른 건 몰라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표절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다니,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말의 무게를 모르진 않을 텐데. 내가 뭘 잘못했지? 그렇게 내 글이 엉망인가?     


쥰은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반차를 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휴가는 팀장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너무 티가 날까 봐 참았다. 퇴근까지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겨우 집으로 돌아와 습관처럼 책상에 앉았다.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습작 노트가 눈에 띄었다. 쥰은 노트를 펼치다 말고 손에 힘을 주다가 그대로 찢어버렸다. 한 번으로 모자라 세로로 한 번 더 찢었다. 두꺼운 노트라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가위를 가져와 난도질했다.      


잘린 종잇조각과 함께 잘려나간 글자가 보였다. 자음, 모음이 잘린 글자의 더미가 꼴도 보기 싫었다. 안 되겠다 싶어 비닐봉지에 담아 변기에다 쏟아 넣고 라이터로 불태웠다. 그을음에 글자 조각이 점점 사라졌다. 이대로 물을 내려버렸다.     

 

한 번, 두 번. 

완전히 떠내려갈 때까지 물끄러미 변기의 배수구만 쳐다보았다. 화장실에 연기가 가득 찬 줄도 몰랐다. 오래된 벽돌집이라 화재 감지기가 없는 게 다행이다. 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서 그런 거야. 쥰은 옷에 밴 탄 냄새를 맡고 그 자리에서 속옷까지 다 벗어 세탁기, 아니 쓰레기통에 버렸다. 알몸으로 침대에 가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글을 쓰지 않았다.      




쥰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은 소피는 앨리스에게 한 것처럼 한 가지 미션을 제안했다.      


“쥰. 잃어버린 글자 조각을 찾고 싶지 않아요? 아직 미련이 남았을 것 같은데.”

“다 태워버려서 없는데요. 어디서 찾아요?”

“실물은 없지만, 아직 쥰의 무의식에는 남아 있어요. 꿈에서 찾아봐요.”

“꿈을 꾸지 않으면요?”     


쥰은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꿈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맘대로 꿔지는 것도 아니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꿈이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쥰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요. 다음 시간까지 꾼 꿈을 기록해 보세요. 난독증 때문에 다 쓰지 못해도 괜찮아요. 쓸 수 있는 데까지만 써 보세요.”     


꿈을 기록하다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쥰은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노트를 살 생각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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