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Oct 21. 2023

앨리스 이야기(5)

9화

앨리스는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쳤다. 

아기를 유산하기 전까지 매일 잊지 않고 쓰던 일기였다. 차마 펼쳐볼 수가 없어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버릴까 하다가 아직은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소피와 두 번째 만남 이후 버리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게 정상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다.     

 

앨리스가 막상 쓰려고 하니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게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전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다. 다 끝난 관계라서 그런지 한 번도 못 해본 욕이나 한바탕하면 모를까 꼭 해야 할 말은 없었다. 소피가 메모 형식도 좋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일기장의 새 페이지를 펼쳐서 써보기로 한다. 

     

내가 버리고 싶은 감정은 ‘죄책감’이다. 정확히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자꾸만 죄책감이 든다.     

 

앨리스는 문장을 쓰다 중간을 지우고 다시 썼다.      


내가 버리고 싶은 감정은 ‘죄책감’이다. 정확히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자꾸만 죄책감이 든다아이를 유산하고 전남편과 이혼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아이를 유산한 게 내 탓이라는 그의 어머니 말에 동조해서 내 탓을 하며 그 핑계로 바람까지 핀 그 나쁜 자식…….     


전남편 욕이 절로 나왔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관련된 기억만 쓰기로 했다.      


나는 죄책감을 버리고 싶다. 유산한 아이, 전남편과의 이혼, 시어머니와의 불화.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자책을 그만하고 싶다.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과 아이를 유산할 때 혼자 병원에 간 모든 기억까지 모두 버리고 싶다. 누구의 탓이든 간에 내가 아직 살 가치가 있다면살고 싶다면 이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버리고, 완전히 버리지 못하더라도 그 감정에 휩싸여 평생을 괴롭게 살고 싶지 않다.      


앨리스는 스스로 너무 비하하는 말은 지웠다. 여기까지 쓰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니까 펜을 쥔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 준 그 집안 식구들, 내 편을 들지 않고 무조건 참으라던 부모님, 무엇보다 그들의 말에 반박은커녕 무조건 순응한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악몽은 앨리스가 자신에게 부여한 무의식의 자기 처벌이다. 일기장에 썼다 지웠지만 죽은 아기를 생각하면 자신은 행복하면 안 된다고,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지만 죽어야 했다.      


그날 밤 앨리스 또 악몽을 꿨다. 악몽이 흐릿해질 정도로 열이 오르내리며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동생 희수가 걱정하며 집에 온다는 걸 독감이라 옮길 수 있다며 극구 말렸다. 대신 죽을 배달해 줘서 이튿날 겨우 눈을 뜨고 침대 밖을 기다시피 해서 나왔다. 현관문까지 걸어가는데 다리가 휘청였다. 식욕이 없어도 먹어야 약을 먹는다. 앨리스는 다음번 소피와의 만남까지 낫고 싶었다. 얼른 나아서 버리고 싶은 것들도 마저 쓰고 싶었다.      



소피의 카우치 세 번째 세션.     


앨리스의 바람대로 외출할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을 회복했다. 소피는 일주일 전보다 수척해진 앨리스를 보며 안부는 묻지 않았다.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앨리스의 성향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앨리스. 미션 수행은 성공적이었나요?”

“저 그게…. 써 보긴 했는데 이걸로 충분한지 잘 모르겠어요.”     


앨리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일주일간 쓴 메모가 담긴 일기장을 가방에서 꺼내 보였다. 소피는 그것을 받아드는 대신 다시 물었다.      


“충분하지 않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쓰고 싶은 말을 다 못 쓴 것? 아님, 쓰고 싶은 대상 모두에게 쓰지 못한 것?”

“쓰고 싶은 대상 모두에게 쓰지 못했어요. 도저히 쓸 수 없는 대상이 있는데 외면할 수가 없어요.”

“그렇군요. 그게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만 지금은 묻지 않을게요. 대신 왜 쓸 수 없는지 이유를 말해줄래요?”     

앨리스와 소피 모두 그 대상이 죽은 아기라는 걸 안다. 태어나지도 못했고, 법적으로 사람도 아닌데, 앨리스가 뱃속에 몇 달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존재 아닌 존재. 실체도 없는 존재에게 그토록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될까 봐요.”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이야말로 앨리스가 가장 원하는 게 아니었나요?”

“맞아요. 하지만…. 악몽을 꾸지 않으면 잊을 것 같아요. 아기를….”

“잊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어요?”   

  

소피의 질문에 앨리스는 동의의 침묵을 보였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앨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아니 소피. 제가 써 온 걸 읽어볼까요?”

“앨리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누워서 해도 되죠?”

“첫 시간 규칙 잊었어요?”     


이 시간은 앨리스와 소피 단둘만의 세계이며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다. 첫 번째 세션에서 소피가 강조한 원칙이었다. 앨리스는 규칙을 떠올리며 편안하게 카우치에 누웠다. 자신이 쓴 글을 읽는 게 어색해서 목소리가 점점 개미만큼 줄어들었다. 소피는 크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 앨리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잠자코 경청하는 자세였다. 앨리스가 다 읽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뭔가 아쉬웠다.      


“앨리스. 이대로 충분한가요? 아! 그냥 누워서 말해도 돼요.”     


앨리스가 일어나려고 하자 소피는 그대로 있으라고 말렸다. 앨리스가 좀 더 긴장을 풀기 원했다.      


“아뇨. 전혀 충분하지 않아요.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고, 물론 제가 그 악몽을 붙잡고 있다는 걸 이제 알지만 그래도 놓지를 못하겠어요. 내려놓는 법을 알려주세요.”

“만약에 아기를 마지막으로 한번 볼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앨리스가 심한 하혈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을 때 설마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임신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기의 움직임을 확실히 느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는데 자신의 몸이 뭔가 허전했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어요. 와줘서 고마웠다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너만 좋다면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 싶어요.”     


앨리스의 대답에 소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에서 한 손에 잡히는 크기의 작은 유리병을 꺼내 왔다.      


“자, 여기에 방금 한 말을 쪽지에 써서 넣고,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어요. 그리고 아기와 추억의 장소가 있으면 그곳에 가서 보내줘요. 바다면 더 좋구요.”     


앨리스는 소피가 내민 유리병을 받아들며 혼자만의 태교 여행을 갔던 해운대 바다가 생각났다. 소피에게 말한 기억이 없는데 어쩌면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혹시 자신도 모르게 해운대 바다 얘기를 했나 헷갈렸다.   


이전 09화 쥰 이야기(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