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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만남(1)

11화

 10월의 바다는 제법 쌀쌀하다. 

앨리스는 이 시기에 바다는 처음이라서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왔나 후회됐다. 밤바다도 보려면 바람막이 점퍼라도 하나 사야 하나 고민하면서 평일 오후의 여유로운 바닷가를 거닐었다. 소피의 제안대로 지금 그녀는 해운대에 왔다. 아기와 헤어진 곳은 병원이지만 그곳을 추모 장소로 쓰기는 싫었다.     

 

전남편과 사이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나서 알게 된 임신은 퍽 당황스러웠다. 임신해도 이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앨리스는 이혼 후 혼자 살 궁리만 했는데 아기와 함께 하는 삶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전남편은 양육권을 주장하며 소송할 기세였다. 처음에는 훨씬 풍족한 곳에서 자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점점 달수가 차고 아기의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앨리스는 아기와 연결되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생각도 정리할 겸 무작정 주말여행을 떠났다. 혼자는 무리라며 부득불 같이 가겠다고 우겨서 동생 희수와 함께였다. 태교 여행이라고 해봐야 어릴 때 살던 고향에 오는 것뿐이지만 아기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8살까지 부산에 살았는데 해운대와 거리가 제법 먼 곳에 살아서 몇 번 오지 못했다. 부산에 살아도 해운대만 오면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신났다. 


이번에는 3년 만에 왔다. 완전히 혼자 왔다. 바다는 그대로였다. 매일같이 파도가 쳐도 바다는 늘 새롭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홑몸이 아니어서 밤바다를 보지 못했다.   

   

앨리스는 근처 마트에 가서 밤바다를 볼 때 입을 후드 점퍼를 샀다. 후드라니 대학생 이후로 처음 입는다. 늘 단정한 옷차림을 중요시하는 그녀였다. 원래는 무난한 바람막이 점퍼나 카디건을 살 생각이었는데 후드 점퍼를 충동 구매했다. 마트에서 쇼핑 후 저녁으로 오뎅 꼬치가 들어간 우동을 먹었다. 입맛은 없는데 밤바다에 가려면 뜨끈한 국물로 배를 채워야 덜 추울 것 같았다.    

  

밤바다는 햇빛과 다른 달빛으로 반짝여 신비로웠다. 반짝이는 점들을 따라 시선도 너울거렸다. 앨리스는 숙소를 나올 때부터 주머니에 넣고 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지난주에 소피에게 받아온 유리병이다. 아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롤링 페이퍼에 담아 유리병에 넣었다. 뚜껑을 닫기 전에 주둥이에 대고 “후!” 하고 얕게 숨을 불어넣었다. 살아있으면 했다. 저세상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다음 생에라도.      


앨리스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남은 숨을 불어넣어서라도 살리고 싶었다. 유리병의 뚜껑을 닫고 잠시 머뭇거렸다. 영화를 보면 유리병을 바다로 던지면 떠다니다가 조류에 실려 와 누군가에게 발견되던데 그런 일은 없었으면 했다.     

 

어떻게 하지. 

앨리스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무거운 돌 같은 걸 매달아 유리병이 떠오르지 않게 하고 싶었다. 모래사장이라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찾기도 힘들었다. 다시 숙소에 갔다가 올까 하다가 오늘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던지기로 한다. 바다 입구에서 던지면 금세 되돌아올 것 같다. 


앨리스는 잠시 쭈그려 앉아 바닷물에 손끝을 대 보았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다는 걸 알자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양말까지 벗었다. 앨리스는 신발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치우고 청바지의 밑단을 종아리까지 접어 올렸다.      

차박. 차박.      


종아리에 닿는 바닷물 소리가 선명하다. 앨리스는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왼쪽 주머니에 꽉 쥐고 있던 유리병을 꺼내 던졌다. 유리병에 눈을 떼지 않고 가는 길을 쫓았다. 방향 조준을 잘못했는지 겨우 10미터도 안 갔다. 안 되겠다 싶어 조금 더 바다로 들어갔다.      


첨벙첨벙.      


물소리를 가르는 소리가 크게 났다. 멀리 떠내려가기 전에 얼른 유리병을 냉큼 주워 다시 힘껏 던졌다. 학창시절에 체육은 꽝이었는데 왼팔이 빠질세라 크게 포물선을 그려 던졌다.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갔다. 어디까지 가는지 눈으로 좇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바다 쪽으로 더 들어갔다. 앨리스는 바닷물이 무릎까지 적신 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던진 유리병을 찾느라 누가 부르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했다.     


“저기, 저기요! 이보세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제 유리병은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앨리스는 자신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어떤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앨리스를 향해 오던 여자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앨리스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누구세요!”     


앨리스는 반사적으로 팔을 쳐내며 누구냐고 물었다. 앨리스의 얼굴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의 팔을 잡은 여자가 되물었다.      


“그쪽은 누구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이러시면 안 돼요!”

“네? 아, 저…. 죄송해요. 바다에 쓰레기 버린 거 아니에요.”     


앨리스는 자신의 팔을 잡은 여자가 바다 쓰레기 무단 투기를 단속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앨리스의 팔을 잡은 여자는 쥰이었다. 쥰은 앨리스가 정신이 약간 나간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바다에 들어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쥰의 말에 앨리스는 그제야 둘의 대답이 어긋난 걸 알았다. 곧이어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앨리스로 돌아와 쥰에게 잡힌 팔을 풀며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다에 해코지 한 거 아니에요. 오해라고요.”

“오해는 무슨! 아까부터 봤구만. 점점 바다 안으로 들어가는 거 다 봤다고요! 죽고 싶은 심정을 모르는 거 아닌데 그래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제발 다시 생각해 보세요!”     


아. 앨리스는 그제야 쥰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았다. 바다 쓰레기 투기범이 아니라 자살시도자라니 더 심한 오해를 사버렸다. 주변을 살핀다고 했는데 어두워서 쥰이 보고 있는 줄 몰랐다. 좀 더 후미진 곳에 가서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진짜 자살자로 오해를 샀겠지만. 앨리스는 웃음이 나왔다. 좀 전까지 죽은 아기 생각에 우울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그녀는 후드의 모자를 벗으며 쥰에게 말했다.      


“발 시린 데 우리 여기 나가서 얘기할래요?”     


쥰은 아! 하며 입을 동그랗게 말고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앨리스의 팔을 놨다. 모래사장으로 걸어가는 앨리스를 따라 발걸음을 돌리는데 발이 꼬였다. 아까 너무도 놀란 나머지 급하게 뛰어와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한쪽 무릎이 꺾이며 바닷물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앨리스가 쥰의 한쪽 팔을 붙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둘은 키가 비슷해서 같은 위치에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보며 살며시 웃음 지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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