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Oct 21. 2023

만남(2)

12화

소피가 쥰에게 내린 미션, 아니 다음 단계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장소와 사람을 찾아가기였다. 

쥰은 자신이 쓴 일기장의 메모가 똑바로 읽혔지만, 소피의 반응으로 봤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소피는 쥰의 엄마처럼 굳이 틀린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쥰은 회사를 관둔 후로 다시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왠지 소피의 말은 무조건 듣고 싶었다. 왜냐하면, 소피도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니까. 소피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잊게 된다.      


쥰이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잠깐 외할머니와 부산에서 살았던 시간이다. 쥰과 한 살 터울인 남동생이 태어나자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 자랄 때까지 계집애들은 친정으로 보내!”라는 시어머니의 명을 받들어야 했다. 그래야 지금처럼 생활비도 지원받고 나중에 남동생 명의의 재산도 물려받을 수 있다. 쥰의 언니는 곧 학교에 입학해야 하니 기저귀도 못 뗀 쥰만 외할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본능적인 불안함에 잘 울지도 않던 아기가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친할머니는 “우리 장손 깬다”라며 얼른 보내라고 호통을 쳤다. 쥰은 외할머니의 품에 안길 때까지 울다 지쳐 잠들었다. 외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자주, 오래 안아줬다. 외할머니가 옛날 포대기로 업어주며 자장가를 불러주면 엄마 생각도 안 나고 잠이 잘 왔다. 쥰은 4살까지 외가에서 살다가 외할아버지가 수술하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외할머니와 살면서 간간이 엄마를 보기도 했지만, 엄마와 헤어질 때도 붙잡지 않았다. 엄마는 “어머! 얘 좀 봐. 제 엄마도 못 알아보나.”라며 약간 서운한 기색을 보이다가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서곤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쥰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부모를 잃은 것보다 더. 언니나 남동생보다 쥰을 더 챙겨주는 건 외할머니밖에 없었는데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 편인 할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그 후로 쥰은 더 말수가 없는 아이가 되었고, 가족들은 거슬리지 않는 쥰을 당연하게 여겼다.      


쥰은 소피의 말을 듣고 곧장 부산에 내려왔다. 비록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옛날에 같이 살던 집터와 해운대를 돌아다녔다. 당일 코스로 왔는데 밤바다를 보고 싶어 하루만 더 있다 가기로 했다. 제법 쌀쌀한 밤바다의 공기를 맞으며 바닷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술에 취한 행인 몇을 제외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쥰은 해변의 끄트머리까지만 갔다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던 중에 앨리스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발만 담그는 건가 싶었는데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 


쥰은 멈춰서서 앨리스를 바라보다가 망설일 새도 없이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바닷속 여자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앨리스는 소피의 미션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볼일이 끝났기 망정이지 그 전에 쥰에게 잡혔으면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난감했다. 바다에서 나왔지만, 모래가 붙은 발로 신발을 신기 난감했다. 심지어 쥰은 급한 마음에 그대로 뛰어 들어가 신발이 다 젖은 상태였다. 쥰이 멋대로 오해한 거지만 앨리스는 쥰의 신발을 보자 미안했다. 앨리스는 대충 발바닥의 모래를 털어 신발을 구겨 신고, 양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쥰에게 말했다. 

     

“근처에 제 숙소가 있는데 신발이라도 좀 말리고 갈래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근데 다시 들어갈 거 아니죠?”

“안 그래요. 적어도 오늘 밤은.”     


앨리스는 애초에 자살할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쥰이 오해할 말을 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순수한 호의를 받아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즐기고 싶었다.    

  

“아! 혹시나 낯선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면 숙소 앞에서 슬리퍼라도 받아가요.”     


앨리스는 쥰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아 말을 바꿨다. 쥰이 “괜찮다”라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몇 번의 말이 오가다가 수건만 받아가기로 합의했다. 바닷가에서 도로만 건너면 앨리스의 숙소였다. 숙소의 상태는 별로지만 바다가 정면으로 보여서 선택한 곳이다. 


앨리스는 쥰에게 숙소의 로비에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청바지를 벗고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은 후 수건을 들고 나왔다. 쥰은 젖은 채 있기 민망했는지 숙소 앞에 나와 있었다. 그새 쥰이 가버린 줄 알고 실망하던 앨리스는 쥰이 입구에 있는 걸 보고 안심했다. 수건을 건네며 즉흥적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밥은 먹었어요? 요 앞에 편의점이 있던데 컵라면 먹을래요? 좀 출출하네요.”     


쥰은 오늘 올라가려다가 좀 전에 생각을 바꿔서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 앨리스를 기다리는 동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긴 했다.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다가 편의점은 눈에 띄는 장소니까 경계를 좀 풀기로 했다. 편의점 앞에 설치된 파라솔에 앉아 각자 컵라면 하나씩을 놓고 마주 앉았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앨리스가 먼저 침묵을 깼다. 밝은 데서 보니까 자신이 연장자 같았다.      


“저. 아까 오해한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할게요. 바다에 들어간 건 죽으려고 한 게 아니라 추억의 물건을 버리느라 그랬어요.”

“아…. 오해해서 죄송해요.”     


앨리스의 설명에 민망해진 쥰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뇨. 그런 말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그저 자살자라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아서요. 딱히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쥰은 앨리스의 마지막 말이 여운에 남았다. 어쩜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불과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낯선 타인이었는데 말 한마디에 친숙함을 느끼다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큰 쥰으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자 앨리스는 아까부터 궁금한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이ㅈ…. 아니, 앨리스예요.”     


앨리스는 이 지수라는 이름 대신 소피의 카우치에서만 쓰던 이름을 말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쥰은 앨리스의 이름을 듣고 자신도 박미영이라는 본명 대신 쥰이라고 했다. 이상하게 본명보다 닉네임을 말하는 게 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같았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이상하네요.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가?”     


앨리스의 농담에 쥰이 동조의 웃음을 지었다. 둘은 그새 불은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한동안 둘 사이에 컵라면 먹는 소리만 들렸다.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은 앨리스가 “음료수 마실래요?”라고 묻자 이번에는 쥰이 산다는 걸 말리고 따뜻한 캔 커피를 사 왔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지나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쥰은 차마 한밤중에 바다에서 뭘 했냐고 물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으니까. 앨리스가 감추고 싶은 비밀을 본의 아니게 엿본 것 같아 미안했다. 이런 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해줄 필요도 없는 자신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앨리스가 언니처럼 보였다. 물론 친언니는 쥰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훨씬 냉담하지만 말이다.      


“쥰.”     


한동안 바다를 보던 앨리스가 쥰을 불렀다. 쥰은 바다에서 시선을 떼고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비정상 같죠?”     


앨리스의 질문에 쥰은 흠칫 놀랐다. 최근까지 소위 전문가들에게 매번 하던 그 질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소피에게 했었다. 쥰은 그 질문이 자신에게 되돌아올 줄 몰랐다. 하지만 대답은 알고 있다.     

   

“아뇨. 전혀.”     


듣기 좋아지라고 한 말이 아니다. 쥰은 진심으로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앨리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가를 명확히 깨달았다.      



이전 12화 만남(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