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Oct 21. 2023

쥰 이야기(5)

10화

“누나가 양보해야지.”

“엄마가 없을 때는 언니가 엄마니까 언니 말 잘 들어.”     


쥰은 이상했다. 어라. 이건 어릴 때 엄마한테 많이 듣던 말인데? 그러고 보니 자신의 방이 아니다. 내 방은 저런 꽃무늬 벽지가 없는데? 뭣보다 엄마 목소리가 왜 들리지?      


“왜 대답 안 하니? 벌써 반항하는 거야? 꼭 나쁜 것만 지애비 닮았다니까.”     


연달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쥰은 언니나 남동생처럼 대놓고 엄마에게 반항하지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는 수동적인 반항을 했다. 엄마는 억지로라도 대답할 때까지 다그쳤다. 쥰은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마지못해 대답하곤 했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가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무조건 “네!”라고 대답했다. 성의 없어 보이면 안 되니까 적당히 진심이 깃든 뉘앙스로 대답하는 요령을 익혔다.      


어릴 적 기억인데 꿈에서 다시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언니와 남동생 말고 나도 엄마 딸”이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시 장면이 바뀌고 동생이 엄마에게 자랑하고 있다.       


“우리 아들 장하다!”     


엄마가 남동생이 쓴 이름을 보고 천재라며 기뻐한다. 가만히 보면 철자도 하나 틀렸는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쥰이 언니가 한글을 배우는 걸 보고 자신의 이름을 써 보였을 때 엄마는 칭찬 대신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연년생인 남동생이 또래보다 늦게 겨우 한글을 뗄 때까지 하도 잘한다는 칭찬만 해서 쥰은 자신이 아는 맞춤법이 틀렸나 착각할 정도였다.     

 

쥰은 엄마가 동생을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얼른 방에 가서 스케치북을 가져왔다. 철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은 온 가족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지난번보다 글씨도 덜 삐뚤빼뚤했다. 엄마는 기뻐하는 대신 “너는 누나가 되어서 동생 기를 죽이냐”라고 했다.      


너무 서운해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엄마 곁에는 칭찬을 뺏길까 봐 씩씩거리는 남동생이 서 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눈코입 대신 쥰이 쓴 이름 ‘문숙희’와 ‘박재영’이 붙어있다. 엄마가 말할 때마다 콧구멍 근처에 붙은 ‘문’의 ㄴ이 꿈틀거렸다. 남동생의 치켜뜬 오른쪽 눈에 ㅈ과 왼쪽 눈에 ㅇ이 함께 치켜 올라가 글자가 삐뚤빼뚤하게 붙어있었다. 글자들이 금방이라도 얼굴에서 튀어나와 쥰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쥰은 점점 다가오는 글자들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시공간을 건너뛰어 집 안에서 쥰의 고등학교 2학년 교실로 장면이 바뀌었다.      


“야! 깜지! 너 글 좀 쓴다고 사람 말이 우습냐? 수업 시간에 몰래 19금 성인물 써서 온라인으로 판다며?”

“뭐? 무,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거 쓴 적 없어!”

“그럼 뭔데? 보여줘 봐!”

“그건 안돼!”

“거봐! 거짓말이니까 못 보여주는 거 아냐? 이거야?”

“이리 내!”     


학교에서 인기 있는 친구가 어느 날 쥰이 쓴 글을 보고 “재미있다”라며 칭찬하더니 글쓰기 과제를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반강제였다. 쥰이 거절하자 다음 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조별 과제에 아무도 자기를 끼워주지 않았고, 급식을 먹을 때나 소풍을 갈 때나 어디서나 혼자였다. 악의적인 아이들은 혼자 잘 다니는 쥰이 못마땅해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다.   

   

선생님도 자신보다 인기 있는 아이의 말을 더 믿었다. 쥰은 교무실로 불려가 습작 노트를 압수당하고, 수업 시간에 글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벗어났다. 그때는 좀 많이 울었다.


맨날 공책에 빽빽이 뭔가를 쓴다고 ‘깜지’라고 놀리든 친구들이 외면하든 상관없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쓴 습작 노트를 뺏긴 게 너무 아까웠다. 담임에게 돌려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교무실 밖에서 훔쳐보던 아이들이 대놓고 비웃었다.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아이들의 얼굴이 습작 노트 표지로 변했다. 노트는 자신을 두고 온 주인을 원망했다.      


“그렇게 소중하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뺏기냐? 어이구 등신! 나도 너 같은 주인 필요 없어!”   

  

쥰은 꿈을 꾸면서 “아니야!”, “돌려주세요!”라고 웅얼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습작 노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자 세상 전부였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마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의 꿈일까. 왜 나를 가만 놔두질 않는 거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잖아. 뭘 요구하지도 않았고, 떼를 쓴 적도 없고, 말썽도 안 피웠잖아?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른 새벽, 꿈에서 소리치다 깨어난 쥰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소피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 산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펜을 잡고 노트를 펼쳤다. 쥰은 새것 특유의 빳빳한 겉표지의 첫 페이지를 넘겨서 백지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신성한 의식으로 여겼다. 지금은 뭔가 시험을 당하는 듯한 압박감이 든다.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방금 꾼 꿈의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써졌다. 어라? 벌써 나은 건가? 망설이던 펜 끝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동이 틀 때까지 쉬지 않고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소피의 카우치 세 번째 세션.      


“소피! 저 이제 다 나았어요!”     


쥰은 소피를 보자마자 인사 대신 큰 소리로 말했다. 흥미로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뜬 소피는 당황하지 않고 쥰을 맞이했다.      


“그럼 써 온 걸 한번 볼까요?”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카우치에 앉자마자 쥰이 건넨 일기장을 펼쳤다. 몇 분의 정적이 흘렀다. 소피가 읽는 동안 쥰은 기다리는 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소피는 빠르게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기더니 이내 ‘탁’하고 소리 나게 덮었다.      


“쥰. 꿈을 기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어요.”

“전부 겪었던 일이라 쉬웠어요!”


“그래요?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엄마가 남동생을 치장했다’가 무슨 뜻인가요?”

“네? 아…. 칭찬인데 빠르게 쓰느라 오타가 났나 봐요.”     


소피는 쥰의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연이어 질문했다.     

 

“그럼, “너는 동생을 죽였냐는요?”

“아! 그건 동생의 기를 죽였냐는 뜻인데 줄여서 쓴 걸 거에요.”

“그럼 이건 무슨 글자일까요?”     


소피는 일기장의 한 면을 펼쳐서 쥰에게 보여주었다. 일기장에는 “선새ㅇ니님이 낳았다. 비웃이 아이다. 소중한 노트를 베꼈다”라고 쓰여 있었다. 쥰은 뭐가 문제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는 “선생님이 나를 믿지 않았다. 아이들이 비웃었다. 소중한 노트를 빼앗겼다”라고 보였다. 쥰은 자신이 보이는 대로 다시 읽어 보였다.      


“설마 이렇게 안 쓰여 있어요?”     


쥰의 물음에 소피는 대답 대신 노트를 닫으며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순간 근심의 눈동자가 비쳤으나 이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다음 스텝이 정해졌군요.”     


소피는 미션 통과 대신 다음 스텝이라는 말을 했다. 쥰은 통과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다음 스텝은….”


이전 10화 앨리스 이야기(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