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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21. 2023

앨리스 이야기(1)

1화

지수는 동생이 ‘소피의 카우치’ 명함을 줬을 때 만해도 제 발로 올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퇴근 한 시간을 앞두고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사무실 바닥만 아니었다면 그냥 하던 대로 버텼을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부터 ‘소피의 카우치’에 방문하다니 지수로서는 상당히 충동적인 행동이다.      


오늘은 다니던 정신과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지수는 출근 복장인 검정 슬랙스 바지에 가는 줄무늬의 푸른색 셔츠를 받쳐입고, 검정 재킷을 걸친 뒤 늘 메던 가방을 들었다. 출근 대신 병원에 간다는 것만 달랐다. 


지수가 병원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꺼내는 데 명함이 떨어졌다. 동생 희수가 병원에서 주고 간 ‘소피의 카우치’라는 상담소였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기 직전, 갑자기 멈춰서서 홀린 듯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안내원 목소리가 들렸다.      


“소피의 카우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수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하는 인사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저…. 거기가 상담소 맞나요?”

“네! 맞습니다.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혹시 당일 예약은 안 되겠죠?”     


자신이 진상 고객이 된 듯해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음…. 어디 보자. 원래는 안 되는데 처음이시죠?”     


안내원은 첫 방문인 데다 예약 취소가 있어서 한 시간 후에 바로 가능하다고 했다. 영업용 멘트가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병원은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소피의 카우치는 지수가 가던 기존의 상담소와 외관부터 달랐다. 언뜻 보면 상담소가 아니라 분위기 좋은 카페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다. 실제로 건물 입구에서 커피 향이 솔솔 흘러나왔다. 건물 입구가 보기 드문 빨간 철제 대문이라 골목 안쪽에 위치해도 찾기 쉬웠다. 상담소는 총 5층짜리 벽돌 건물의 4층에 있었다. 빨간 문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았다.     

 

4층까지 어떻게 올라간담.      


지수는 괜히 왔나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화를 신고 올걸. 4층까지 걸어갈 각오로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나선형 계산을 따라 반 바퀴 돌았을 뿐인데 눈앞에 ‘4F’라고 큼직하게 쓰인 층수 표시와 함께 사람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직사각형의 황금 푯말로 ‘Sophy’s Couch’라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뭐지? 분명히 4층이랬는데. 층수 표기가 잘못된 건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지수는 건물주의 인테리어 컨셉이라 여겼다. 상담소 입구는 유리문으로 닫혀 있어서 인터폰을 누르게 되어 있었다. 지수가 버튼을 누르자 누군지 묻지도 않고 바로 열렸다. 어떻게 알고 열어주는지 궁금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지수는 상담소나 정신과를 가본 경험이 많지만, 처음 방문하는 곳의 문 입구에 서면 항상 긴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온갖 식물들이었다. 상담소 로비 한 가운데에 안내데스크가 없었다면 화원에 온 줄 착각할 뻔했다. 인테리어로 화분을 배치한 수준이 아니라 무슨 온실에 온 것처럼 온갖 덩굴식물과 각종 허브, 알록달록한 꽃들, 조그만 연못까지 꾸며져 있었다. 

예전에 희수가 핫플레이스라며 자신을 억지로 데리고 갔던 카페가 생각났다. 지수의 눈앞에 나비가 날아왔다. 비현실적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10시 예약하신 이지수 님 맞으시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의 안내원과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지수는 아직도 수면제 기운에 남아있어서 멍한 건지 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기하려고 앉을 곳을 두리번거리는데 의자가 없었다. 대기실에는 그녀 빼고 아무도 없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곧이어 안내원이 상담실로 안내했다. 작은 연못을 지나고, 길쭉한 복도 끝의 동그란 아치형의 보라색 문 앞에는 ‘Sophy’라고 작게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지수는 상담소장의 본명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건물 규모로 봐서는 몇 명의 프리랜서 상담사를 둔 여느 상담소보다 커 보이는데 예약할 때 어느 선생님께 상담받을 건지 묻지 않았다. 안내원은 문 앞까지만 바래다주고 가버렸다. 지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어색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와요.”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으로 소피가 앉아 있었다. 30대 중반인 지수보다 어려 보이지는 않는데 묘하게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소피는 약간 마른 체격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단발 머리를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하나로 묶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회색 A라인 스커트를 입었는데 차림새만 보면 지수의 출근 복장과 비슷했다. 맨다리에 풍성한 털이 달린 보라색 슬리퍼에 빼꼼히 드러난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발이 눈에 띄었다.      


소피와 지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았다. 지수는 여름 끝 무렵인데 벌써 털 슬리퍼라니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라기보다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 카우치였다. 소피의 의자는 짙은 남색에 가까운 보라색이었다. 지수가 앉은 카우치는 에메랄드빛이 도는 보라색이었다. 

처음 보는 오묘한 색깔에 눈길이 갔다. 지수는 원래 이렇게 산만한 타입이 아닌데 아무래도 수면제 기운이 남아서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지수가 카우치에 앉자 소피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수는 소피가 한 첫 질문이 이상했다. 들어올 때부터 이상했는데 무엇을 도와주냐니 무슨 백화점 점원이나 할 법한 말투가 거슬렸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니까 온다. 명함에 적힌 데로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든 신뢰가 가지 않는다. 지수는 소피의 말에 급속도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카우치에 놓인 쿠션을 끌어 앉고 싶었다. 소피는 지수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첫 질문 이후로 가만히 있었다. 몇 분간 정적이 흘렀다. 지수가 고개를 획 들고 턱을 약간 치켜들며 불안함을 숨기려고 딱딱한 말투로 내뱉었다.     

 

“뭐든지 다 없애준다면서요?”     


다짜고짜 따지듯 말하는 지수의 물음에 소피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잠깐 번뜩였다. 소피는 안경 받침대를 한번 쓸어올린 후 상체를 약간 기울여 지수에게 말했다.      


“뭘 없애고 싶은데요?”

“당장 없애줄 수 있어요?”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있어요. 대가만 지불한다면”     


지수는 평소답지 않게 인내심이 떨어졌다. 항상 차분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는데 소피를 보자마자 당장 없애 달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얼마나 됐죠? 2년? 3년?”     


이어지는 소피의 물음에 지수는 자신의 상태를 간파당한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그녀지만 다 쏟아내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카우치의 쿠션으로 손이 갔다. 어릴 때 갖고 놀던 애착인형처럼 푹신했다. 갑자기 그 인형이 어딨는지 궁금해졌다. 부모님 집에 가면 찾아봐야겠다.      


“얼마나 된 것 같아요?”     


지수는 상담사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소피는 지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사도 안 했네요. 반가워요. 난 소피라고 해요. 지수 씨는 이름이 뭐예요?”    

 

방금 내 이름을 불러놓고 이름이 뭐냐니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황당해하는 지수의 표정을 보고 소피가 덧붙였다.      


“남이 정해준 이름 말고, 자기가 정한 이름을 물은 거예요.”

“예명을 정하라고요?”

“음…. 예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 달라요. 자신을 좀 더 관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한 이름을 짓는 거예요. 일종의 페르소나라고 하죠. 어떤 페르소나를 가지고 싶은지, 혹은 자신이 바라보는 본인의 페르소나가 뭔지 정하는 거죠. 평소에 불리고 싶은 이름이나 되고 싶은 캐릭터가 있을 텐데요?”     

갑작스러운 주문이기는 했지만 사실, 있었다. 지수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를 무척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서 여러 버전의 책과 영화까지 소장하다가 결혼하면서 친정에 두고 왔다.      


 “저, 그럼 앨리스로 할게요.”

 “오! 지수보다 훨씬 잘 어울리네요. 좋아요. 앨리스. 여기서는 앨리스와 소피로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어때요?”

“음…. 뭐, 그래요.”     


어색한 듯 대답했지만, 지수 아니 앨리스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앨리스가 되어서 약간 들떴다. 평소의 그녀라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무슨 역할극 놀이냐고 따지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지수에게는 충동적인 하루지만 앨리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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