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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Mar 17. 2024

집 나갈 때 이것만 해놓고 가

감자탕

감자탕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으레 감자탕은 술안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알코올을 한 방울도 못 먹는 내가 일부러 찾아서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 가끔 비자발적 선택으로 뼈다귀 해장국을 먹은 적은 있다. 이런 류의 음식은 당. 연. 히! 음식점에서 사 먹는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용주부가 있기 전까지는. 


남편이 요리를 하게 되면서 가사에 대한 부담이 많이 줄었다. 문제는 식비였다. 매 끼마다 진수성찬으로 별미를 해 먹다가는 만족감은 둘째 치고, 시간과 돈 낭비가 심했다. 아무 할 일이 없는 백수도 아니고(백수도 매끼마다 집 밥을 해 먹는데 모든 시간을 쓰진 않는다), 생활비 중 고정 지출을 제외한 가장 많이 차지하는 항목이 식비였기에 줄여야 했다. 


매 끼 질리지 않으면서 식비도 절약되는 식단. 


이것은 흡사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아무리 식단을 다양하게 짜도 식비 절약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고심 끝에 매 끼마다 해 먹는 거 말고, 한 번에 많이 해서 두세 번 정도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선정했다. 

그 첫 번째 메뉴가 바로 '감자탕'이다. 


나: 감자탕? 식당에서 소주랑 먹는 그 감자탕을 집에서?
용주부 : 응!
나: 해 봤어?
용주부: 아니?!
나:...


용주부는 아직 요린이라 요리에 도전 정신이 강하다. 나는 요린이 일 때도 도전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 귀찮은 짓을 뭐 하러? 


이게 나와 용주부의 차이점이다. 나는 관심 있는 영역(극히 소수다)을 제외한 나머지 일에 대부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잘하지도 못한다. 요리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다. 다행히 못 먹을 정도의 맛은 아니라서 그럭저럭 흉내는 내는 편이다. 


용주부는 관심 있는 부분은 덕후 기질이 있어서 파고드는 편인데 요즘 요리가 그렇다. 

감자탕은 용주부가 된 지 불과 며칠 안되었을 무렵의 요리다. 단골 감자탕 집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서 먹기가 귀찮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야 하고, 인기 있는 맛집이라서 못 먹고 올 때도 있다. 


집에서 내가 원할 때, 편안하게 감자탕을 먹고 싶었던 용주부는 어느 공휴일 기어이 날을 잡고 감자탕을 시도했다. 두둥!


감자탕에 필요한 재료를 사러 몇 년 만에 재래시장까지 갔다. 나는 뭘 사야 할지 모르니 주변 구경하기 바빴다. 용주부는 매의 눈으로 지나가는 정육점마다 돼지 등뼈를 샅샅이 훑었다. 감자와 얼갈이까지 사고, '오늘 저녁은 감자탕이겠구나' 부푼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다. 


나: 등뼈 핏물 빼려면 오래 걸리지?
용주부: 30분도 안 걸리는데?
나: 그래? 그럼 오늘 먹을 수 있는 거야?
용주부: 당연하지. 3시간만 기다리면.

감자탕에 들어갈 재료 손질하고, 끓이는 데만 약 1시간 5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용주부는 돼지 등뼈의 핏물을 빼고, 삶고 다듬기 시작했다. 


 

큰 냄비로 모자라서 두 군데 나눠서 끓인 돼지 등뼈. 1차로 삶기


감자탕처럼 부피가 큰 음식을 할 일이 없으니 곰국 끓일 때나 쓰는 들통이 없었다. 2인 가족이 사는데 들통을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중에는 들통이 생겨서 여기다가 했다. 좁은 주방에서 등뼈를 두 군데 나눠 끓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도 따라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뒤로 얼갈이배추를 다듬고, 마늘을 빻고(꼭 즉석에서 빻는다. 풍미가 다르다나;;;), 양념을 만드는 과정은 지루해서 공부를 하러 방에 들어갔다. 요리 에세이인데 레시피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드디어 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감자탕을 먹게 되었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뚝배기가 없어서 모양새는 아쉽지만, 맛은? 


며칠 식단 걱정없이 든든한 감자탕

식당에서 맛보던 조미료 맛이 나지 않고, 오직 자연 재료만으로 끓인 양념 특유의 맛이 부드러운 얼갈이와 포근한 감자까지 한데 어우러져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났다. 돼지 등뼈의 누린내도 없고, 먹고 싶은 만큼 뼈를 발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만큼 한 냄비가 더 있다는 게 더 행복했다. 


나: 우와! 나 집에서 감자탕 처음 먹어봐!
용주부: 음식점에 비해 어때?
나: 이제 감자탕 먹으러 갈 필요 없을 거 같아!
용주부:... 이거 일 많아...
나: 알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이 해! 당장 들통을 사야겠어.

집에서 감자탕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용주부의 거침없는 도전 정신 덕이다. 우리는 메인 메뉴만 있으면 밑반찬이 필요 없는 타입인데 감자탕이 딱 안성맞춤이다. 


돼지등뼈에 붙은 살을 살살 발라내서 먼저 먹고, 잘 익은 감자를 약간 으깬다. 감자탕 국물에 적셔서 밥 한술 말아서 얼갈이를 척 걸쳐서 한 입 먹으면 완벽한 한 끼 식단이다. 


엄마 품을 벗어나면서부터 먹는 일이 이렇게 수고스러운 일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나에게는 먹는 일,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먹는 일을 책임지는 게 어떨 때는 진절머리 날 정도로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이었다. 내 입맛은 뒷전으로 하다 보니 가리는 음식은 거의 없어도 입이 짧고 까탈스러운 편이었는데 어느새 대충 맞춰서 먹게 됐다. 


한때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었다. 삶을 단순화할수록 인생은 덜 고통스럽다. 옷장에 넘쳐나던 옷, 숫자뿐인 연락처, 의미 없는 만남까지 없애고 나니 삶이 좀 단순해졌었다. 은둔의 시간을 보내기 딱 좋았다. 


단 하나 남은 것, 먹는 일마저 용주부가 도와주면서(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더 심플해졌다. 용주부가 대신 요리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먹는 것도 거창하게 몇 첩 반상에, 국이 있어야 되고 등등 이런 형식을 집어치우고, 같은 메뉴를 여러 번, 한 가지만 먹어도 충분히 만족하게 되었다. 


용주부가 요리를 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같은 메뉴만 계속 주면 대놓고 싫은 소리는 못해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것이다. 본인이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음식 불평을 덜하게 되었다. 

반찬 투정하는 남편이나 가족이 있다면 직접 해보라고 하는 편이 잔소리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심플한 삶을 완성하는 심플한 식단. 

몇 날 며칠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감자탕. 

비록 조리 과정은 쉽지 않지만, 김치찌개처럼 더 쉬운 요리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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