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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Mar 31. 2024

남편이 너무 잘 먹어서 "얄밉다"라고 했다

쌈쌈쌈! 쌈요리 스페셜(ft. 강된장, 간장불고기, 닭갈비)

물리학의 '에너지 총량의 법칙'은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마다 타고난 에너지가 다르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축적된 나만의 지표에 가깝기에 그리 신빙성은 없으나 나 자신에게는 꽤 잘 들어맞는다고 보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약했던 나는 잔병치레를 달고 살았다. 지금은 겉으로 보면 전혀 약해 보이지 않는 외양을 가지고 있어서 "네가???"라는 물음표를 세 개 이상 달게 되지만, 어릴 때는 체력에 걸맞게 말랐기 때문에 더 비실비실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도 그리 활기가 넘치는 어린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얌전한 아이도 아닌데(엄마의 말로는 조용히 사고 치는 타입이란다) 활기차게 움직이지 않으니 얌전한 것 '처럼' 보일 뿐이었다. 

남들이 나를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라고 보는 것만큼이나 나도 그렇게 납득하고 있었다. 소심한 성격을 탓하고, 나는 왜 좀 더 외향적이지 못할까 자책했다. 


어른이 된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나는 성격이 내성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 에너지가 별로 없는 아이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에너지 총량의 법칙'처럼 전체 에너지가 10이라면 몇 가지만 활동해도 에너지가 소진되니까 애써 뭘 할 수 있지를 않은 거다. 


문득 30대 초반에 만난 한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뚜렷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기력이 없고, 소화 불량, 불면증 등의 상태로 늘 몸 컨디션이 최상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사회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범으로 여기며 퇴사만이 답이라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그때 만난 한의사 선생님은 내 배에 엄청나게 큰 장침을 냅다 꽂았다. 누워서 마주하는 침의 크기에 정신을 잃은 (엄살이 좀 심한) 내가 "선생님, 저는 왜 이 모양일까요?"라고 한탄 섞인 말을 했었다. 


그때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의 나를 보며 인자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에너지의 양이 있는데 평균적으로 10이라면, 소피 씨는 5를 가지고 난 거예요. 컨디션이 최고일 때조차 일반인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처럼 힘들 때는 어떻겠어요?"


당시에는 한의사로서 으레 하는 말인 줄 알고 별 감흥이 없었다. 

요즘따라 이 말이 다시 생각나는 이유는 며칠 전, 용주부와의 식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 전, 용주부가 해준 간장불고기를 상추쌈에 싸서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한창 쌈과 싸우고 있는데 그런 나를 용주부가 물끄러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용주부: 맛있어?
나: (쌈을 입 한가득 넣고) 응!
용주부: 참 잘 먹네!
나: (씹는 중)...
용주부: 차암~ 얄밉다! 


얄밉도록 쌈에 싸서 잘 먹은 연탄간장불고기


입 한가득 쌈을 꿀꺽 삼키고 그제야 용주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본인이 해 준 요리를 잘 먹어서 "기분 좋다", "뿌듯하다"도 아니고 "얄밉다"라니...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나도 느껴봤던 감정이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됐다. 

용주부를 하기 전. 남편은 내가 요리를 하고, 식탁에 수저까지 다 놓아야 나타났다. 그리곤 대화도 없이 10분도 안 돼서 빨리 먹어치우고, "잘 먹었어!", "고마워!"라고 했다. 


입맛 까다로운 사람이 잘 먹으면 좋긴 하다. 좋은데... 

오늘 뭐 먹을지 메뉴 선정부터 시작해서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주방에서 한 시간 이상 서서 조리하느라 식탁에 앉으면 이미 지쳐서 식욕이 떨어졌다. 


조금 쉬었다가 밥상을 차리면 음식이 다 식으니까 선 채로 바로 식탁에 차리게 된다.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오래 서 있거나 앉으면 허리 통증이 온다. 


자리에 앉아 좀 쉬었다 먹을라치면 그동안 기다리느라 배고픈 남편은 안 그래도 빠른 식사 속도가 2배속이 된다. 나는 절반도 채 먹지 않았는데 벌써 다 먹고, 밥을 더 달라거나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면 몸은 자동적으로 움직이다가도 화가 났다. 


잘 먹으면 잘 먹은데로, 맛없다고 손도 대지 않으면 그거대로 화가 났다.
잘 먹는 모습이 얄미웠다. 
사랑과 미움은 다른 감정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있다.
이런 양가감정을 식사할 때마다 느끼곤 했는데 용주부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내 마음을. 


나는 원래 쌈을 좋아했다. 용주부는 쌈 싸 먹는 걸 귀찮아해서 별로 즐기지 않았다. 가성비 좋고, 간편한 요리를 찾다가 강된장 쌈밥을 해 준 적이 있는데 내가 며칠 연속으로 먹어도 질리지 않고 잘 먹어서 놀라워했다.


내 입맛에 맞게 덜 짜고 자작한 국물이 있는 강된장 쌈밥

원래도 간편하게 먹는 편인데 상추쌈만 있으면 다른 밑반찬을 먹을 겨를이 없다. 김치도 어쩌다 한 점 집어 먹을까 말까다. 쌈을 몇 번 싸 먹으면 포만감이 커서 과식도 덜 하게 된다. 


고기를 먹으면 나는 상추파, 용주부는 파무침 파다. 나는 파무침도 상추쌈을 싸서 먹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상추를 집에서 키워보고 싶다. 최근에 상추쌈을 먹은 음식은 닭갈비다. 처음에는 밥반찬으로 그냥 먹었는데 양념이 제법 매웠다. 


나: 이거 상추에 싸 먹으면 간이 딱 맞겠는데?
용주부:... 또 쌈?
나: 쌈이 최고지!
용주부: 남은 건 쌈 싸 먹어.


손 큰 용주부가 양이 너무 많아서 들통에서 양념한 매콤 닭갈비(참고로 2인 가족)


요즘 내가 밥을 먹을 때 참 전투적으로, 맛있게 먹는다고 한다. 얄밉다는 농담 섞인 진담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남이 차려주는 밥은 다 맛있다는 주부의 말이 있듯이, 내가 차리지 않아서 맛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에너지 총량의 법칙'을 얘기했듯이 내가 가진 에너지로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내고 나면 맛있게 먹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음식 하면서 맡는 냄새 때문이기도 했고, 이미 몇 시간 동안 음식하느라 지쳐서 맛있게 먹을 기력이 없었다. 


만드는 데 한두 시간, 먹는데 십 분, 치우고 설거지하는데 삼심 분을 쓰고 나면 그냥 눕고 싶어 진다. 식사가 에너지를 얻기 위한 건지 뺏기 위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용주부가 요리를 하는 날이면 재료 손질부터 요리는 용주부가 하고, 수저를 놓고, 밥을 푸는 건 내가 하고, 함께 맛있게 먹는다. 다행히 용주부는 요리를 하고도 맛있게 먹을 에너지가 남아 있다. 여전히 나보다 빨리, 많이, 잘 먹는다. 만약 나처럼 요리하느라 지쳐서 잘 먹지도 못했다면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 뒤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는 내 몫이다. 예전에는 요리를 하고 식탁을 차리는 것도 내가, 치우고 설거지도 내가 다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용주부에게 요청하면 도와는 주지만 스스로 하는 법을 몰랐다. 


아무리 용주부가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들 설거지까지 다 하면 나도 모르게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집에서 살림이나 하려고 회사를 관둔 게 아닌데' 하며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열 받아서 한바탕 퍼부으면 용주부는 영문도 모르고 실컷 잘 먹고(공복에 화내지는 않는다),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일단 체력적으로 지치니까 감정이 더 예민해졌다. 맨날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살려고 먹는 건지 먹으려고 사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정작 나를 위해 쓸 에너지는 없었다. 어쩌다 하루에 두 끼를 하고 나면 하루가 후딱 갔다. 혹자는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맞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유난 떤다고 할 수도 있다. 


당장 친정 엄마만 해도 내가 대학원에 다니고 프리랜서로 재택 근무한다고 하면 그냥 노는 줄 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남편이 요리까지 한다면 "너는 뭐 하냐?"라고 되물을 게 뻔하다. 그들의 이해를 바라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해명하는 말로 보이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정말 얄미울 정도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된 건, 그만큼 에너지를 덜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에너지로 좀 더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은 많고, 이 정도 해야 한다는 기준도 높아서 항상 힘들었다. 내 욕심이 내가 가진 에너지와 비례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항상 얼마 되지 않은 에너지를 외부로 향해서 나에게 쏟을 에너지가 별로 없었다. 


의지의 문제라고,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자책과 원망을 많이 했더랬다.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는 미라클 모닝하며 갓생 직장인으로 사는 게 가능할지 몰라도, 누구는 제때 출퇴근하는 거 조차 버거운 사람이 있다. 


친한 동생은 회사에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 지각은 습관이라고, 지각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심했는데 그 동생의 내막을 알고부터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동생은 만성 우울증이 있어서 정신과 약을 타 먹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도 하고, 영양제도 열심히 챙겨 먹는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겨워서 택시를 타고 겨우 출근할 때가 많다. 


점심은 김밥 한 줄로 때우면서 택시비로 2~3만 원의 비용을 지출하며 겨우 출근하는 걸 욕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좀 이해한다. 누군가에게는 별 일도 아닌 것이 그 동생에게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용주부가 요리를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나는 다른 걸 할 에너지를 얻었다. 쌈을 호기롭게 싸 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얄미워하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한 쌈 야무지게 싸 먹으면서 글이라도 한 줄 더 쓸 기운을 충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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