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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Aug 04. 2024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시판냉면의 한 끗 차이)

물냉면

삶에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 누구나 한 가지씩 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민감하다. 

그래서 애초에 '약속'이라는 말 자체를 잘하지 않는다. 


용주부는 음식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에 잘못 먹고 탈 난 적이 있는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고, 매일 한 끼마다 신중을 기한다. 


처음엔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래?"하고 물으면, 언제나 "자기 먹고 싶은 걸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용주부의 음식에 대한 내숭(?)은 얼마 안 가 들통이 나고 만다. 

함부로 음식 투정했다가 굶길까 봐 내 눈치를 본 것뿐이었다. 

그는 나와 거의 정반대에 가까울 정도로 음식에 민감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먹는 것'은 선택에 관한 전권을 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는 딱히 매일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런 생각 자체를 귀찮아하는 편이다. 


게다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편식이 심한 모습에 기껏 요리했는데 손도 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야채를 먹지 않는 아이에게 반강제로 먹이는 것 마냥 거의 협박과 강요를 일삼다가 그도 폭발해 개싸움으로 치달은 적이 많았다. 


몇 번 그런 싸움을 하다 보니 서로 지쳐서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첫째, 메뉴 선정은 많이 먹는 사람(용주부)이 할 것. 

둘째, 이것저것 만들어봐야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으니 반찬 가짓수를 줄일 것.

셋째, 음식에 타협할 수 없는 사람(용주부)이 요리할 것. 


그리하여 내 남편은 '용주부'라는 부캐를 가지고 작년 말부터 조금씩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차려 주는 밥을 맛있게 먹으며 내가 한 일은 설거지나 뒷정리, 밥상 차리기 등이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용주부의 오늘은 뭐 먹지'를 간간이 연재하기 시작했다. 


물론, 매 끼니마다 남편이 요리를 한 건 아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내가 평일 밥상을 책임질 때가 많았고, 그는 주로 주말이나 쉬는 날에 이벤트처럼 요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문제는 용주부가 요리의 맛을 알게 되면서 점점 내가 하는 음식에 불만을(감히!) 품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음식과 타협할 수 없는 사람이 요리까지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요즘같이 덥고 지칠 때 배달 음식도 한두 번이지 매끼마다 뭘 먹을지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마침 용주부가 좋아하는 냉면을 먹기 좋은 계절이라 시판 냉면을 사서 몇 번 해 준 적이 있다. 

물론, 냉면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서 자가제면으로 만든 곳이 아니면 취급도 안 하는데 수많은 시판 냉면 중에 그나마 입에 맞는 제품을 찾았다. 


시판 냉면은 라면보다 끓이기 쉽다. 

면이 엉키지 않게 잘 풀어서 끓여주면 1분도 안 돼서 익는다. 

함께 든 육수만 냉동실에 잠깐 얼리면 시원한 냉면이 된다. 

계란을 삶고, 쌈무와 오이만 곁들이면 그럴듯했다.


그러다 주말 오후에 먹고 남은 시판 냉면이 있었다. 

용주부는 어디선가 레시피를 또 u튜브로 보더니 오이를 가지고 뭔가 조제하길 시작했다. 

나머지 과정은 내가 만드는 것과 같았다. 


비빔면을 먹을 때도 동봉된 비빔양념만 쓰지 않고 김치 국물을 이용해 감칠맛을 내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뭘 하는 건지 알람까지 켜 놓고, 오이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시 뭔가 열심히 만들었다. 


용주부가 요리할 때는 맘 놓고 내 할 일만 하는 편이라 별 신경도 안 썼다. 

그래봤자 시판냉면 맛이 어디 가겠는가. 


드디어 용주부표 냉면이 완성되었다. 

내가 만든 것과 가장 큰 차이는 오이였다. 

나는 오이를 씻어서 생으로 채 썰어 고명으로만 올렸는데 용주부의 냉면에 들어간 오이는 뭔가 달랐다. 


용주부표 물냉면


나: 오이에 무슨 짓 했어?
용주부: 먹어 봐.
나: (한번 맛본 후)와! 오이를 절였는데 아삭함과 새콤함이 같이 있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용주부: 후훗. 냉면 국물도 한번 먹어 봐.
나: 뭐지? 내가 한 거랑 다른데? 같은 제품 맞아?

용주부는 오이를 식초와 설탕 등등을 이용해 절인 뒤 물기를 짜고 남은 국물을 냉면 육수와 섞었다고 한다. 


그 결과, 시판 냉면 특유의 밍밍함을 새콤한 오이가 잡아줘서 식당에서 먹는 것과 비슷한 퀄리티의 맛이 났다. 


분명히 재료는 지난번에 내가 쓴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맛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결과물의 차이를 만들었다. 

한 끗 차이로 맛집 부럽지 않은 맛을 낸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환상의 조합 냉면과 만두.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웬만한 냉면 맛집에서 먹으려면 몇 만 원을 훌쩍 넘는다. 

물론 식당에 가서 먹는 건 나름대로 다른 매력이 있지만, 퇴근 후 얼른 먹고 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땐 시판 냉면으로 오이만 신경 써서 만들면 좀 더 맛있는 냉면을 즐길 수 있다. 


나: 그동안 내가 만들어준 게 맘에 안 들었겠다?
용주부: ... 맛있다고는 말 못 하지. 


음식과 타협할 수 없는 그답게 쓸데없이 솔직하다. 


괜한 오기가 생겨서 용주부에게 오이 절임 레시피를 전수받아 똑같이 해 보았다. 

그런데 맛이 왜? 다를까?


용주부: 내가 알려준 대로 했어?
나: 응!
용주부: 근데 왜...
나: 사실은 맛소금 비율이 3인지 5인지 헤갈려서 더 넣다가 말았어. 식초도 넣다가 딴생각하느라 한 숟가락 더 넣었나?
용주부: ... 그냥 내가 할 게.


내가 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런 건 절대로! 결단코! 아니다. 

다만, 요리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그렇게 진지하게 하질 못했다. 


같은 레시피라도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의 손 맛은 확연히 다르다. 

예전엔 엄마가 되면 저절로 손 맛이 생기는 줄 알았다. 

나는 영영 엄마가 될 일이 없으니 그 맛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뻔뻔하게 변명했다. 


그러나 용주부를 보고 얼마나 큰 착각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어떨 땐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먹기 위해 사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맛있는 음식이 삶의 질을 향상하는 건 맞지만, 그만큼 누군가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일찌감치 그 부분을 포기했다.

그냥 적당한 맛으로 적당한 만족을 얻는 걸로 타협했더랬다. 

특히 사는 게 힘들 땐 더 그랬다. 


대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살면서 누구나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씩 있다.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용주부가 한 끗 차이로 시판냉면을 맛집 냉면으로 변신시킨 덕에 그는 보다 맛있는 냉면을, 
나는 이렇게 글 쓸 소재가 생겼다. 
여러모로 윈윈 아닌가.


나는 음식의 맛과 타협하지 않은 용주부가 있어서 참 고맙다. 

그리고 서로 타협하지 않는 것들이 달라서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음... 상상만 해도 제 nnn차 개싸움이 연상된다. 


맛보다 타협할 수 없는 건 가정의 평화니까. 


그는 오늘도 맛있는 요리를 연구하고, 
나는 오늘도 그의 요리를 기록한다. 



Tip.

한 끗 차이로 대박집 냉면 맛을 내는 레시피가 궁금한 사람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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