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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의 용기가 되고 싶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by 김지연

새로 출간할 책의 원고 교정을 마쳤다. 아마 이 원고를 보는 건 인쇄 전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재밌게 쓸 때와 달리 다시 읽고 고치는 작업은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들어 고되다. 새로운 글을 내놓을 준비가 된 건지, 섣부른 시도가 아닌지 조금 겁도 난다.

얼마 전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오던 날, 서촌 어디쯤에서 새 책의 텀블벅 준비를 마무리했다. 비가 그친 밤길을 걸으며 뿌듯과 불안 사이를 넘나들었지만 그 틈에서 설레는 마음이 좋았다. 오랜 친구와 뜻이 맞아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와인 한 잔 따라 놓고 함께 앉아 일했던 저녁은, 시간이 한참 지나 친구가 기르는 에둘레 소철의 잎이 풍성해질 즈음에도 기억나지 않을까.

같이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혼자 감내하고 책임지는 게 더 익숙한 타입이었고 자주 그런 상황에 처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해낸 뒤의 성취를 사랑했다. 어쩌면 기댈 수 있는 동료가 성취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게 없을 땐 힘들었다.

작년 여름 충청도 여행이 생각난다. 한창 허리가 아파서 주변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도 엄마의 도움으로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간 터였다. 대학시절의 답사와 같은 코스로 여행하다 보니 창밖의 풍경에선 그때 함께였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였다. 그 얼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지 않았다면 무사한 답사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고, 답사부장이었던 내 성과로 그해 답사를 기억해왔던 게 부끄러워졌다.

혼자 잘해서 이뤄지는 일은 없다. 게다가 조금 성기더라도 여러 사람의 리듬이 얽히고설킨 것이 더 재미있고 아름답다. 영화 <행복한 사전>에선 '대도해'라는 이름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드넓은 언어의 바다를 건넌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일뿐더러, 심지서 한 세대에서 끝나는 일도 아니지만,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앞서 길을 트고 그 뒤를 이으며 바다를 헤엄쳤다. 같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동료에 대한 신뢰가 어쩐지 숭고하기까지 했다.

혼자 하는 듯 보이는 일을 하지만, 아마 지금의 나도, 내 성과들도 혼자 이룬 건 아닐 테다. 눈에 보이는 근거 없이도 일단 나를 믿고 맡겨준 사람들, 내 글을 다듬어 세상에 드러내 준 사람들, 행간의 의미까지 읽어내 준 사람들, 혹은 다시 쓰고 말하며 더 널리 알려준 사람들, 옆에서 응원하고 배려하고 도와준 가족과 친구들, 지금도 내 원고를 읽어 주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나와 같이 일해 온 사람들이다.

쓰는 게 힘들고 다 부질없어 보이는 날이 나라고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얼굴들을 생각하면 든든하고 다시 해볼 용기가 난다. 그렇다면 역시, 나도 내 일도 혼자는 아닐 거다. 나 혼자 온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연결됨으로써 더 넓게, 멀리 뻗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성취가 유일한 동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때때로 잘 안되거나 망하는 날이 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손잡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므로.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델마든 루이스든 혼자였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믿음직한 친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무모하더라도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나도 지금까지 늘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용기 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곁에서 그 사람의 용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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