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해 온매체가 12주년을 맞이했다. 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매체. 내가 쓴 글이 공식 매체에 처음 실렸던, 그 표지를 다시 보니 여러 가지 마음이 뒤섞여 먹먹한 기분이다. 덕수궁 인근 신아일보 건물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그 안에 쌓여 있던 종이의 냄새, 40대였던 대표님의 얼굴을 아직 기억하는데, 그때의 그 잡지가 12년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기쁘다.
글을 쓸 수 있는 빈 공간을 얼떨결에 받아 든 그날의 기분이 기억난다. 이걸 내가 받아들여도 될지, 아니 이 분은 지금 뭘 생각하고 처음 보는, 심지어 경력도 없고 어린 나한테 이렇게 큰 지면을 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기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놓은 것은, 지금 다시 보면 부끄러워서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최선을 쏟아부은 글이었다.
그러고 보면 대표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의 방향이나 세부 사항에 대해 크게 터치한 적도 없으셨고, 글이나 상황에 대한 조금 치기 어린 태도도 늘 존중해주셨다. 그런 것들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키워줬고, 어쩌면 글을 계속 쓰기로 결정한 용기가 되어 주었을 거다.
그렇게 매 순간, 조금은 분에 넘치는 기회를 준 사람들 덕에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쉽게 해낼 수 있는 수준보다 조금 과한 기회, 그것을 받아 들고는 나를 믿어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늘 성장해왔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건, 나를 믿고 기회를 주고 좌충우돌하며 자라는 모습까지 너그러이 바라봐 준 이들 덕이다.
한편으로,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믿고 열린 기회를 주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너그러워지는 만큼 본인이 짊어지는 리스크는 커진다. 그것을 각오해야만 타인에게 분에 넘치는 기회를 건네주고 너그럽게 지켜봐 줄 수 있다. 그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기 위해 안전하게 닫힌 곳만 찾을지, 리스크를 짊어지며 열린 결말을 함께 찾아갈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분명 후자가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오늘 그런 얘기를 나눴다. 성장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삶의 축복이라고. 무너질 수도 있는 순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그 틈에서 온전히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과 환경을 가진 것은 무엇보다 큰 행운이라고. 그래 어쩌면, 믿어주고 안아주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 성장을 천천히 기다려주는 사람들 덕에 내 삶도 조금 더 온전할 수 있었다. 그건 나를 너그럽게 안아 준 어른들 덕이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든 나를 믿고 평온하게 곁에서 버텨 준 동생이나 친구들 덕이기도 하다
큰 행운은 쉽게 만날 수 없지만, 작은 행운들은 주변에 은근하게 산재해 있다. 그 작은 행운들을 귀하게 여기고 곱게 붙잡아 점을 이으며, 가늘지만 긴 선을 긋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선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가 만난 마음과 얼굴들이 빛난다. 내게 약간의 틈을 내주는 이들, 내가 애써서 건네준 마음과 호의를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사람을 믿고 리스크를 함께 짊어질 줄 아는 좋은 어른들 사이에 있어서 나는 잘 자랄 수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자라고 있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 시간이 지나고 떠올렸을 때 쉬이 기댈 수 있었던 너그러운 언덕으로 기억되었으면, 고마웠던 기억으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그러려면 사람을 쉽게 믿는 마음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리스크를 함께 짊어져도 버틸 수 있는 마음과 체력과 사회적인 단단함을 준비해야 할 테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부족한데 자꾸 뭔가 더 성장하고 싶다는 건 욕심일 수 있지만, 그래도 더 좋은 친구가, 어른이,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지금 떠오르는 얼굴들을 사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