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y Jun 12. 2021

일상이 필요한 날

나를 먼저 돌보기

작은 수난이 연이은 하루였다. 이걸 쓰기 직전엔 세면대에 손가락을 세게 부딪히기까지 했으니. 아주 지친 하루는 차라리 쓰러져 잠들기라도 하지만, 그저 괜찮지 않은 일이 많은 이런 하루는 이도 저도 아닌 뭉개진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한다. 오늘만은 아니었다. 주말 내 컨디션 난조로 스스로 약속한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자꾸 나를 탓했다. 주로 내일을 기대하는 편이지만 이런 날은 덜컥 겁이 난다. 벌여 놓은 많은 일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나 하나라.


전에도 말했지만 일기엔 다짐과 바람을 담다 보니 늘 실제의 나보다 크다. 담대한 척 하지만 이런 날들이 이어지면 타인은 물론 나를 품을 자리조차 없어진다. 여지없이 드러난 내 바닥을 본다. 그 와중에 당연하게 부탁하고 바라는 상황을 만나면 꽤 지친다. 나도 이런 날엔 누군가에게 치대고 기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럴 땐 꼭 나쁜 버릇이 나온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고 혼자 있으려 하는 것. 평소엔 사방에서 별의별 다정함을 다 찾아내지만, 마음이 약해진 날엔 그런 게 잘 보이지 않는다. 관계의 요철만 눈에 띄고 그걸 내 탓으로 돌린다. 오늘도 타인의 다정함에 몇 번 찡했으면서, 그건 구석으로 밀어 숨겨 둔다. 찾으려 애썼는데도 다정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면 상처 받을까 처음부터 찾지 않은 척하는 거다. 이 나쁜 버릇을 진작 알았는데 잘 고쳐지지 않는다. 뭐든 안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체력이 부족한 것 외에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 생각하다, 책상에 잔뜩 쌓인 책과 전시 리플렛들을 봤다. 지금 내게 온 일들을 다 해결하지 못한 상태, 아직 해치우지 못한 타인에 대한 일들, 짐 같은 마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흐트러진 방이 거기 있었다. 뭐든 여유 없이 빠듯하게 잡으면 안 되는데,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자꾸 누구에게 내줘 버린다. 오늘 일정 사이에 매년 가던 곳에 벚꽃이 피었는지 보고 싶었지만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에너지가 부족한 날엔 나를 위한 작은 용기조차 내기 어렵다.


그사이에 나를 챙기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어린 자신이 있는데, 그 아이를 잘 대접하고 챙겨줘야 대부분의 삶이 평화롭게 굴러간다. 내 마음속 어린 지연이는 몇 주만 돌봐주지 못해도 이렇게 성질을 낸다.


딱 지금 같은, 아니 지금보다 더 안 좋았던 때 혼자 틀어박히려 떠났던 제주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던 비 오는 아침이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와 드리퍼 아래로 커피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창밖의 흙과 풀 냄새, 커피 향이 겹쳤다.


아무것도 아닌 그 순간, 뭍에서부터 지고 온 무거운 마음들이 반쯤 사라졌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의 재건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마치 영화 <리틀 레스트>의 혜원이 고향에 돌아와 밥을 지어먹으며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수선했던 것처럼.


어차피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단 걸 안다. 순간은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한참 지나고 돌아보면 오늘의 괜찮지 않은 작은 일들, 사소하게 요동치는 마음은 조그만 굴곡에 불과할 거다. 여기까지 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오늘도 결국 지나면 아무렇지 않을 날일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오늘의 괜찮지 않음을 괜찮음으로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 사소한, 그러나 좋아하는 일들을 해야지. 끝도 없이 가라앉을 때도 삶을 유지하는 건 그런 작은 일상들이다.


공개된 곳에선 좋은 얘기만 하고 싶지만, 딱히 동화 속에서 사는 인간은 아니라 매번 넘어지고 절망하는 걸 어쩔 순 없다. 그럼에도 일기를 쓰는 건, 이렇게 해야 조금이나마 다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 하루 중에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라서. 징징대기보단 그냥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 안에서 나에 대한 다정함을 먼저 발견해야 타인이 내게 주는 다정함도 발견할 수 있다는.


내일은 우선 좋아하는 근처 카페에 걸어가 남이 내려 준 커피에 레몬 파운드를 먹고, 이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련 나무를 보러 가야지. 작업이 급하긴 하지만, 일단은 진작에 다 읽으려 했던 책을 마저 읽으면서 오후와 저녁을 버틸 용기를 충전해야지. 챙겨야 할 타인의 일들이 산재한 걸 알지만 당분간은, 그 당분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조금 더 먼저 챙겨야겠다. 내가 괜찮아야 타인에게 내어줄 자리가 비로소 생길 것이므로.

작가의 이전글 안전한 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