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우리나라의 명절 문화를 많이 바꾸어 놓은 듯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집안의 명절 제사 문화도 쉽게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 기간 동안 방송에서 이동을 제안할 때는 차례를 지내지 않고 건너뛰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설과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명절엔 모두들 고향 가느라 차도 밀리고 물가도 엄청 비싸다. 공원묘지에서 만나 절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명절 2주 전에 만나 산소에 가서 성묘하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작년 추석에 시아버님도 둘째네도 남편도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합의를 하였다. 종갓집 맏며느리가 이제는 못하겠다고, 안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막내 서방님과 동서가 제안을 해주니 다행이었다. 이제는 사촌들도 각자 명절을 보내고 있고 원가족만 만나게 되니 조금 한가할 때 만나면 된다. 남편 원고향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었지만 몇 년 전에 파묘하고 수목장으로 해서 고향에 갈 일은 없어졌다. 설 때는 춥고 길도 미끄러워 못 갔지만 추석에는 되도록 갔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당시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밥도 제대로 못하는 데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도 계시고 두 시동생까지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2층 양옥집이었데 한쪽은 전세를 주고 하숙을 몇 년 치른 적도 있었다. 결혼하고 3년을 어쩔 수 없이 시댁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결혼하고는 정말 난감했다. 그런 나를 위해 시어머니는 양념에 일일이 글씨로 적어서 잘 모르는 며느리가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장을 봐 오고 음식 솜씨가 좋으셨서 반찬등은 직접 거의 해 주셨다. 다만 빨래에 집안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학생이었던 남편은 저녁이면 종일 동동거리던 다리와 발을 꼭꼭 주물러 주며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충분히 사랑받는 느낌이었고 많은 것들을 참아 낼 수 있었다. 분가해서 부천에 살다가 다시 청주에 정착했다. 2016년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그동안 봐왔던 것을 토대로 뒤를 이어 제사를 지냈다. 결혼초에 제사가 상당히 많았으나 시어머님께서 물려준 제사는 조부모님 제사였다.
상대리 코스모스 길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대신해 그동안 봐왔던 대로 정성 들여 제사를 모셨다. 시어머니는 안 계셨지만 동서들과 합심해서 설과 추석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 제사를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동안 바온 것들과 해왔던 것들이 있어서 어렵지는 않았다. 막내 서방님은 대기업 임원으로 있는데 오래 해외근무를 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했다.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 명절 때에 내려오려면 차가 많이 밀려 힘들어했다. 두 시간이면 족히 올 거리를 다섯 시간 걸릴 때도 있었으니 길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피곤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두 동서도 딸들을 출가시켜 사위를 보고 나니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 그래서 작년 추석에 가족회의를 했고 올해부터는 명절 2주 전에 만나서 성묘하고 식사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홀로 계신 시아버님께서는 속으로 좀 서운하셨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괜찮다고 하셨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처음엔 맏며느리로써 '이래도 되나' 괜히 돌아가신 시 어머니과 살아계신 시아버님께도 죄송해서 속마음이 찜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례를 지내고 당일 산소에 다녀와 급하게 다들 짐 싸서 가기 바빴는데 2주 전에 모이니 시간적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많아 좋았다. 이번에도 몇 가지 준비해서 9월 16일에 산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비가 엄청 오는 바람에 간신히 우산을 쓰고 기도하고 막걸리를 따라 드리는 예식만 간단하게 가졌다. 남편은 어머니께 가족을 대표해서 살아 계실 때처럼 인사를 나누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예약된 식당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소고기 집으로 할까 했는데 그동안 많이 먹어서 질린다고 해서 잘하는 복요리 집으로 정했다. 고기를 굽지 않고 복요리가 코스로 요리가 나오니 먹기도 좋았다. 아버님도 입맛에 잘 맞다고 하시며 잘 드셔서 다행이고 형제들은 물론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연신 웃음꽃을 피우곤 했다. 두 동서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즐기게 되어 기분 좋았다.
아파트 인근 공원
방송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명절로 인해 이동한다고 보도되었는데 실감 났다. 추석 명절 즈음에 살 것이 있어서 마트를 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전에 명절에 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차례를 지내지 못했지만 올해부터는 명절 때 만나서 차례도 지내고 가족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나 보다. 물론 차례 문화는 집안마다 많이 바뀐 듯하다. 우리 집처럼 제사 대신에 성묘를 하고 식당 가서 음식을 사 먹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마트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아직은 그래도 제사를 지내면서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들렸거나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지 어떤 것들은 미끼 상품으로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물가는 엄청 비쌌다. 같은 물건을 명절 성수기라고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불합리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올 설 때도 그랬듯이 우리는 미리 만나서 성묘와 식사를 통해 친교를 다 끝냈다. 동서들도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이고 편안하고 좋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과도 1주일 전에 식당에서 먹고 싶은 걸 먹으며 수다 삼베경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명절날 지나면 항상 우리 집에 모여 떠들썩하게 식사를 즐겼던 큰딸과 둘째 딸 가족도 서울 나들이와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엔 연휴가 상당히 길어서 해외여행도 많이 간 듯하다.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시간을 보낼 때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연휴를 활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미 하고 있는 가정들이 많을 것이다. 모든 상황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가족에게 맞게 다들 합의해서 편한 대로 하고 있고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그동안 크게 힘들진 않았지만 두 어깨에 진 짐들을 이제는 살짝 내려놓고 싶기도 하다. 졸며느리는 아니어도 이제는 생활에서 느슨하게 여유로움을 느끼며 살고 싶다. 전통이라 해도 너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야겠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