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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08. 2024

완벽한 휴가

    내 인생에 휴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는데 질병이라는 형태로 휴가가 주어졌다. 나는 이 휴가가 썩 마음에 든다. 내가 쉬는 것에 대해 세상 누구도 시비 걸지 않는 완벽한 상황이다. 나더러 고르라고 했어도 이보다 더 나은 형태의 휴가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12일 금요일 (벨케이드 4회 차)

  불면증과 변비가 조금씩 심해진다. 어젯밤 자정 넘어 잠들었는데 새벽 3시에 깼다. 오늘은 주사를 맞고 나서 대전에 내려간다.
  그저께 예진이와 통화한 후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짜증내서 미안해. 내가 요새 걱정할 게 많고 체력적으로도 너무 지쳐 있어서 그랬어. 그리고 어제처럼 고생스럽게 이사하고 나면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한국 생각이 많이 나는데 참고 있는 거야. 그런데 엄마랑 통화하면 엄마는 내가 한국 돌아오길 바라는 것 같아서 그동안 견뎌온 마음이 무너지려고 해. 쉬는 날이 되어도 딱히 만날 친구도 없어서 서러울 때가 많은데 엄마가 자꾸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면 나는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스스로가 더 한심해지는 것 같아.”     
  나도 답 문자를 보냈다.
  “예진아, 넌 엄마 마음을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구나. 엄마는 네가 일본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았으면 해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는 거야. 손 놓고 있다간 1년 후 돌아오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있겠니?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꼭 찾으란 뜻이야.”
  내 말은 진심이다. 예진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들도 못 만나면서 일본에서의 생활을 고집하는 예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라고? 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외로움과 고단함을 참고 견뎌서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한 거다.         
나는 딸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랐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13일 토요일

  어제저녁 6시가 넘어 대전 집에 도착했다. 그러니 출발 전에 도합 12시간가량을 병원에서 소모한 셈이다. 불친절한 택시 기사, 약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아버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낑낑대는 엄마가 내 마음에 무게를 더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예솔이와 해후한 순간은 황홀했지만, 지친 몸이 곧바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야 부모님은 간신히 휴식시간을 가지셨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엄마의 상심과 염려,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왜 굳이 지금 대전에 내려와야 하는지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았고, 엄마 본인이 왜 굳이 따라와야 하는지(아빠가 따라가야 한다고 고집해서 따라오신 것이므로)도 모르는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저녁 준비를 해야 했던 엄마가 보기엔, 내가 그토록 보고파했던 예솔이가 나를 그다지 반기는 듯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내심 서운했던 것 같다.
  칠십 대 중반에 들어선 엄마 자신도 건강에 자신이 없는데 나를 간호하느라 지친 몸이 쉴 틈을 갖지 못하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더해져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일 터이다.

  밤에 예진이가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일본인 동료로부터 자기가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일본어가 능통하다는 뜻이니 그동안 고생하며 공부하고 일한 보람이 있다 싶어 마음이 흐뭇했다. 엄마도 기뻐하셨다.
  막내 예솔이는 큰딸 예은이와 통화하면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만 전화 바꾸라는 데도 계속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남편과 이사 문제와 예솔이 교육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 행복하다.
  오늘 아침엔 피로감이 많이 가셨다. 어제 외래에서 만났을 때 앞으로 열흘간은 휴가라고 말씀하시던 민창기 교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겨우 두 달 만난 민창기 교수님이 선생님 같고 친구같이 느껴진다.
나는 더 없이 완벽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간간이 끊어지는 인터넷 전화로나마 예진이와 제법 길게 통화했다. 밥 먹는 문제와 취로비자 얻는 문제, 그리고 해외연수 이야기도 했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번 전 직원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주는데 올해는 하와이로 간다고 했다. 예진이는 자기가 하와이 여행에 참여하게 된 것이 좋으면서도 사장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장님이 돈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예진이에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직원들이 애사심을 갖게 하려는 사장님의 배려라고 말해주었다. 애사심을 가진 직원들은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할 것이고, 최고의 서비스를 받는 고객들은 비싼 이용료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니 결국 회사에 이익이 된다고. 좋은 회사는 직원을 소모품처럼 여기지 않고 가족처럼 여김으로써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고 그렇게 얻은 이윤을 다시 직원 복지와 고객 서비스 향상을 위해 대투자하는 것이라고.
  예진이가 기술적으로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에 투입될 수 있을 정도로 숙달되었다고 하니 이제는 경영자의 마인드를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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