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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01. 2024

사명과 목표가 필요해

타인의 삶을 방해해서는 안 돼

    투병하는 동안 나는 자신이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잘못을 용납받을 수도 없고, 남보다 더 많이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당연히 여겨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것은 나의 문제일 뿐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의 문제가 있건만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 해서 그들의 문제가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를 돌보느라 지치고 몸이 망가져 가는 것이 죄스러웠고, 나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들의 행복한 미래를 마음껏 꿈꾸지 못하게 될까 봐 염려되었다.  

    부디 내가 어떤 길을 가든지 사랑하는 가족들은 자기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족들의 희생을 딛고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7일 일요일 일기 계속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병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잘못을 용납받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당연히 여겨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픈 것은 나의 문제일 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아픔과 문제가 있건만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 해서 그들의 문제가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친정아버지의 허리가 많이 안 좋아진 것 같다. 내 병을 알게 된 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동안 너무 애를 많이 쓰셨다. 아버지는 내가 몇 달 안에 완치되는 것을 기대하셨으므로 본인의 몸을 전혀 아끼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셨다. 내 병은 단기간에 치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아버지는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당신이 간절히 염원하면 딸이 금방 나으리라고 믿으셨다.
  이렇게 두 달 가까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생활하신 것은 노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다다음주에 대전에 모시고 갈 때 꼭 MRI를 찍어보시게 해야겠다.      
아픈 나를 정성으로 돌보신 부모님
일기 발췌_2010년 3월 9일 화요일 (벨케이드 주사 3회 차)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사명이 필요하다. 나의 사명을 찾지 못한다면 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사명은 나의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나에게 가장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심리상담을 하는 일이었다. 개인상담이든 커플상담이든 독서그룹이든 형태는 달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아파하며 문제를 분석하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일은 큰 에너지와 끈기를 요구했지만, 그래서 더 보람이 있었다.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기 전까지 상담했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나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로선 나의 건강이 더 나빠지면 안 되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병이 다 나으면 이런 사람들을 마음껏 상담하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작년 9월 K 대학교 일만 시작하지 않았어도 몸이 이 지경으로 망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건강해진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대학 강의는 포기하고 상담은 조금만 하자. 독서모임과 부부모임은 계속하고 교회 일은 열심히 하리라. 자연은 좀 더 가까이하고 부모님과도 좀 더 가까이하리라.      
일기 발췌_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어제저녁부터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진다. 한 달 전 고열과 복통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고통스러운 증상이 사라졌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느꼈던 감사와 삶의 의욕이 다시 차오른다. 고통의 유익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집 일을 돕는 한권사를 통해 예진이에게 택배를 보냈다. 예진이가 잠시 다니러 왔을 때 챙겨놓은 물건에다 현미와 김치를 더하여 새로 이사한 주소로 보냈다. 얼마나 양이 많았던지 우송료가 5만 원도 넘게 나왔다.
  예진이는 이로써 거처를 세 번째 바꾸는 것이다. 주된 일터는 원래대로 도쿄의 EVE 지점이지만 우동집에서 아르바이트하기 위해 지난주에 면접을 보았다고 했으니 이번 주부터 우동집 일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거기서 일하면 식사 한 끼는 해결이 되려나?
  요즘 예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본인 말로는 1차 목표가 경제적 자립이라 하니 현재로선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돈을 버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2차 목표는 취로 비자를 얻어 일본에 정착하는 것인데 아직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실주의자인 우리 예진이가 1, 2차 목표를 이룬 다음에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당장 이루기 어렵더라도 좀 높은 목표를 설정했으면 좋겠다. 그 목표가 아름다운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면 더 좋겠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치료 스케줄이 조금씩 구체화됨에 따라 이사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분양받은 덕명지구 N아파트의 입주일은 5월 말이고 가능한 가장 빠른 골수이식 날짜는 6월이다. 몸 상태는 이식 직전이 가장 양호할 것이니 이사 계획을 세우려면 6월 전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대전에 내려가면 아파트가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보러 가야겠다.  
  “내일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친정엄마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읽은 구절이다. 이 책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의 전기로, 하루 만에 완독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역사 인식을 얻었다.
  저녁에 사촌동생과 이종사촌 언니 부부들이 방문했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다. 형부는 4월이 되면 자기 집 정원에 꽃이 만발하니 보러 오라고 하였다.
  아침 일찍 윤지윤 집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6월에 귀국한다고 하였다. 나는 4월을 기다리고 6월을 기다린다.               
나는 4월을 기다리고 6월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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