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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우유와 도망시와 고도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시청 후기

by 이소라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첫 회를 보자마자 팬이 되어버렸다. 박서준이 분한 이경도의 순수함과 원지안이 분한 서지우의 엉뚱함이 케미를 촉발하는, 유쾌한 드라마였다. 첫회에서 남주와 여주를 연결해주는 세 가지 요소가 나오는데 바나나우유와 추사의 <도망시>,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이다. 작가는 시청자가 잘 아는 문화적 키워드를 사용하여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영리한 전략을 구사한다.


대학 신입생 경도는 500원짜리 동전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바나나우유 사먹어야 하는데, 라며 되뇌다가 친구의 채근에 동전 찾기를 포기하고 수업에 들어간다. 우연히 근처에 있던 지우가 동전을 찾아서 그 돈으로 바나나우유를 산다.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걷는 지우에게 연극반 선배 세영이 동아리 가입을 권하지만 지우는 관심이 없다. 화장실 다녀올 동안만 부스를 지켜달라고 부탁받은 지우가 잠시 세영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경도가 부스를 방문한다. 경도는 지우의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것이지만 안 그런 척 한다. 가입신청서에 쓰인 개인정보를 보고 경도의 이름과 학과를 알게 된 지우는 경도의 강의실에 찾아와 대뜸 그를 꼬여낸다. 술꾼 지우와 함께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된 경도는 황당해하면서도 지우의 매력에 서서히 스며든다.

사실 지우는 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그녀는 패션기업 오너의 딸로 미국 유학 중 잠시 귀국하여 친구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 지우의 어머니는 냉정한 여성으로 딸들에게 정을 주지는 않고 대기업 후계자가 지녀야 할 조건을 갖출 것만 강요한다. 미국 유학도 전적으로 어머니의 뜻에 따른 것인 것 같고 결혼도 집안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게 될 것 같다.

어느 날 경도와 지우는 추사 김정희를 주제로 한 인문학 강연에 참여하여 추사의 <도망시>에 대해 듣게 된다. 천리 밖 귀양지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추사가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시다.


어찌하면 월하노인에게 빌어서

다음 세상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

천리 밖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슬픔을 알게 하리오.


경도가 읊어주는 시를 들은 지우는 굵은 눈물을 흘리고, 경도는 지우의 엉뚱함 속에 깊은 슬픔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얼떨결에 연극반에 들어간 경도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줄 대사를 연기하게 되고, 지우는 부모님이 한 달 여행을 떠난 참에 연극반 스탭 노릇을 하며 연극반원들과 합숙을 하게 된다.

연극 대사 중에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까.’라는 대사가 있었다. 이 대사를 지우에게 들려주며 경도는 “나는 앞으로 많이 울 거야. 그러면 네가 덜 울게 될 거니까”라고 말한다.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경도에게 지우는 점점 더 의지하게 된다.

01.35791664.1.png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야기방식을 통해 드라마는 지우가 연극 공연일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경도는 자기 대사에서 ‘고도’를 ‘지우’로 바꾸어 말했던 것 같다. 2025년에 만난 연극반 선배들이 경도가 “지우는 오지 않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라고 하며 울었다며 놀린다.


대학 시절 이 연극을 보았을 때 나는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기다림의 대상, 기다려도 오지 않는 어떤 대상인가보다 했고 나에게 고도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지우에게 고도는 확실히 경도였다. 회상 신에서 가끔 나오는 지우의 대사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고도는 기다려도 오지 않지만 경도, 너는 올 거지?”

지우의 말과 반대로 경도가 지우를 기다리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지우는 다시 만난 경도에게 “온다며. 고도는 안 와도 너는 온다며?”라는 말로 그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그러므로 기다림인 것 같다. 지우가 기다렸던 것은 부모의 사랑이었으나 그것을 받지 못하자 누구든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을 기다렸고 순수한 영혼인 경도가 지우 앞에 나타났다. 드라마 시놉시스를 보면 한국에서 겨우 한 달을 지내고 부모에게 붙잡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지우와 경도는 스물여덟에 다시 만나나 보다. 하지만 둘은 신분차이 때문에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2025년의 지우가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재벌집 아들과 정략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신문사 연예부 차장인 경도는 지우 남편의 스캔들 기사를 쓰면서 지우 걱정에 안절부절 못한다. 경도는 아직도 지우를 잊지 못하고 있다. 서른여덟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다는 것, 지우 회사 브랜드의 양복만 입는다는 것, 연극 브로셔 사진을 찍을 때 입었던 오렌지색 티셔츠를 목이 늘어날 때까지 입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경도의 기사를 읽은 지우는 경도에게 도망시의 한 구절을 문자로 보낸다. 도망시는 그리운 이에게 가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인 동시에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경도는 기다리던 마음을 숨겼지만 지우는 다 알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른 세상에서 서로 바꿔 태어난 추사와 그의 아내처럼 애틋하다. 둘은 어찌하든 상대가 덜 상처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엉뚱한 행동들을 계속할 모양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고도와 달리 경도와 지우는 마침내 서로에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음 주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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