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와 '아직'의 이중주
나는 2025년 11월에 공식 노인이 되었다. 늙는다는 것은 일종의 상실이므로 슬픈 일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말로 위로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 스스로 늙어감을 환영하기란 쉽지 않다.
나와 같은 시기에 91세가 되고 96세가 된 분들이 있다. 나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이다. 두 분에 비해 한참 젊은 내가 늙어감에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면 이분들은 오죽하겠는가. 이분들이 일찌감치 늙어감의 현실을 받아들이셨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두 분 다 툭하면 “내가 벌써 OOO 해야 한다니”하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의 ‘내가 벌써’는 보청기를 끼는 일과 함께 시작되었고 친정어머니의 ‘내가 벌써’는 수면제 복용과 함께 시작되었다. 젊은 내가 볼 때 아흔이 다 되어 보청기를 끼면서 ‘벌써’ 라고 하는 것은 시의적절치 않았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도 될지를 걱정하는 것은 넌센스였다. 대체 몇 살에 보청기를 끼는 것이 적당하며, 몇 살에 수면제를 먹는 것이 나이에 맞을까? 시어머님께는 “청력이 남아있을 때 보청기를 끼셔야 청력이 좀 더 오래 유지된대요. 보청기가 있어서 얼마나 좋아요?”, 친정어머니에게는 “잠을 못 자서 다음날을 망치기보다는 약의 도움을 받더라도 푹 주무시는 게 나아요. 잠 오게 해주는 약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라는 식으로, 위로와 격려를 섞어 말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은 두 어머님들이 ‘벌써’를 말하기 훨씬 전, 나이 사십이 되면서부터 ‘내가 벌써’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축구를 할 수 없다니, 벌써 흰머리가 나다니, 벌써 돋보기를 써야 하다니, 벌써 콜레스테롤 약을 먹어야 하다니, 하는 식으로 ‘벌써’의 목록이 끝없이 이어지더니 3년 전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을 받고 나서는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그런 것을 보면 ‘벌써’ 타령은 아직 위기의식이 덜한 사람이 하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늙어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에게 나는 초연한 척 하면서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되는 거지, 당신만 안 그럴 줄 알았어요?”하고 핀잔을 주었다. 앞으로 50년은 ‘벌써’ 타령을 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에게는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분은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분들에겐 자신이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것이 헛될지언정 유일한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의 ‘벌써’를 수습하느라 정작 나 자신의 노화에서 오는 우울감을 인정하지 못했던 내가 공식 노인 인증을 받게 된 시기를 전후해서는 ‘이런 것이 노화의 증상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사실 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하기에 지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가? 나도 저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 칠십 줄에 들어선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적인 모임에서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들어서는 주의를 완전히 자신에게로 돌려놓으며 장황하게 이야기하고는 나중에 변명조로 한다는 말이, ‘생각났을 때 안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30년 지기 다섯 명이 모였는데, 이 모임의 최연장자와 최연소자 사이에 12살 차이가 난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나는 사람들이라 하고픈 말이 쌓여서 그랬을 테지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언니들이 남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그와 유사한 자기 이야기를 꺼내거나, 누군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릴 때 그의 말을 대신 완성해주려는 시도들이 무성했다. 대체로 듣고 있는 편인 내가 관찰해보니 그러한 현상은 나이에 비례하여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피로를 느꼈다. ‘나도 더 나이 들면 저렇게 염치가 없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또 다른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나 자신을 성찰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나로선 참다 참다 한 마디 한 것이지만 상대는 나의 태도에 불만을 표하며 ‘시어머니처럼 좀 굴지 마세요’ 했다. 그 말이 당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혼자 있을 때 가만 생각해보니 ‘이렇게 참지 못하는 것이 노화의 증상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 말고 다른 네 사람은 대놓고 서로에게 불만을 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20년이 넘은 영어스터디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모임에선 내 나이가 가장 많다. 원서 논문을 같이 읽자는 취지로 시작된 모임이었는데 모두들 학위를 따고 나서는 논문을 읽을 필요가 없어서 요즘은 인문학 원서를 함께 읽고 있다. 영어에 대한 감을 유지할 수 있고 치매도 예방될 것 같아서 계속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비대면 모임을 겸하면서부터 삐꺽대는 일이 생겼다. 이 모임에선 돌아가며 자기가 맡은 본문을 해석하는데, 자기 해석 차례가 아닐 때는 늘 누워서 듣기만 사람이 있는가하면 단골로 지각하거나 모임 자체를 잊어버리기 일쑤인 사람이 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대체로 성실하게 준비해오고 스터디 시간에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편이다. 요즘은 곰브리치의 『A Little History of The World』를 읽고 있는데 어린이를 위해 쓰인 책이라 그런지 독특한 관점에서 접근한, 틀에 박히지 않은 역사책이다.
나는 불성실한 두 사람에게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가끔 대면으로 만날 때 즐겁게 얘기하다보면 그런 불만이 해소되었으므로 그럭저럭 버텨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해 마지막 모임에서 발표자와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제시간에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줌 대신 사용하는 웨일온이 자꾸만 끊어지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30분이나 늦게 입장한 A가 “안녕하세요” 하는데 나는 “안녕하지 못해요” 라고 말했다. A에 대한 불만을 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날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나의 반응을 말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들었나보다. 화상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표정을 읽었을 테니 나도 말을 좀 더 조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서로의 감정이 더 격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이가 갑자기 내려와서 데리러 가느라 모임 시간을 놓쳤어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했다. 나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에 참을성을 잃고,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일찍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도 좀 해줘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서운하네요, 선생님. 그렇게 시어머니처럼 말해야 해요?”라고 했다. 그럼 당신은 기다리는 사람이 서운한 것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제발 시간 좀 잘 지킵시다” 하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죠’라는 말은 용서해주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 잘못을 한 사람이 하는 말은 아니다 싶어 그 다음날까지도 화가 식지 않았다. 영어 스터디 따위는 안 해도 그만인데 왜 마음 상해가면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에게 영어 공부가 절실했던 때에 비해 지금은 절실할 일이 없으니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을 탓할 수도 없다. 다만 스터디를 지속하기로 합의했으면 시간만은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인데 제대로 해보자고 하는 나를 탓하는 것이 역반하장으로 느껴져 화가 났다. 게다가나의 돌직구 화법이 노화 현상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우울해졌다.
노화로 인한 나의 우울감을 표현하겠다고 해놓고 다른 사람을 흉보는 글을 써놓고 보니 이 또한 서글프다. 노인의 감정은 슬픔으로 수렴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존중받기 원하는 만큼 나도 더 늙은 노인들의 마음을 살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