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열흘 만에 요양원에서 나오셨다. 엄마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져 식사도 안하신다고 하는데 그래가지고 어떻게 다음 주 치과진료를 받을 기력이 있겠느냐고 했다. 집에 모시고 와서 좋아하시는 장어국이라도 드시고 힘을 내게 한 다음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주 치과 외래에 갈 때 집에 들러 장어국 한 그릇을 뚝딱 드셨기 때문에 엄마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이다. 이번에도 집에서 식사만 하고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것인지 치과 가는 날까지 집에서 모시고 있겠다는 것인지 물어보니 그건 아빠를 모시고 와봐야 안다고 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양원 측에서는 아빠를 지금 모시고 나가면 2주 동안은 재입소가 불가하다고 했다 한다. 코로나 상황이 여전히 엄중하고 학생들의 등교개학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빠를 모시고 나와야겠다는 엄마의 채근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천안에 계신 삼촌을 불러 아빠를 모시고 오겠다고 하는 것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분을 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삼촌더러 모시고 오라고 하느냐며 내가 모시러 갔다.
엄마는 당장 모시고 오기를 바랐지만 내 일정 때문에 오후에 모시러 갔더니 아빠는 혼수상태(인지 잠인지 모를 상태)에서 깨어나셔서 점심식사까지 하셨다고 했다. 휠체어를 태우고 차로 가는데 아빠가 자기를 데려가서 어떻게 할 거냐고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하도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엄마에게 있는 대로 포악을 떨었다. 왜 잘 계시는 아빠를 모시고 가려고 하느냐며. 집에서도 주무시느라 식사 안 하시는 날도 많았고 배가 아파서 안 하시는 날도 많았다. 병원이나 시설에 계실 때는 집으로 모셔오지 못해 안달이고 집에 있을 때는 힘들다고 신세타령을 하는 엄마를 나는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다.
“다시는 저에게 상의하지 마세요! 전화도 하지 마세요”라고 있는 성질을 다 끌어 모아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부모님을 지하 주차창에 내려드리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리고 나서 일주일을 엄마 집에 가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어떠신지 또는 집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전화할 필요도 없이 내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치과 예약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아빠를 모시러 갔다. 요양원에 입소하느라 시설요양등급을 받아서 더 이상 오지 않았던 요양보호사가 다시 오고 있었다. 엄마 혼자서도 관공서 관련 일처리를 잘 하고 있었던 거다. 치과에 갈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엄마가 무슨 상의 비슷한 말을 꺼내도 못들은 체 했다. 그렇게 아빠의 치과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요양원에서 퇴소하신 지 딱 2주째인 토요일 정오쯤에,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집에 인터폰을 하셨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 시간에 나는 외출 중이었다. 남편이 나 대신 친정에 갔더니 아빠의 그 혼수상태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는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병원에 가야할지, 무슨 병원에 가야할지, 요양병원에 가면 이런 사람을 받아는 줄지, 간병인을 써야 할지, 간병인을 부르기는 쉬운지, 간병비는 얼마나 드는지 등을 물었다고 한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전화로 알아보았고 요양병원도 당장 입원가능하고 간병인도 당장 부를 수 있다는 답변을 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병원으로 가자거나 간병인을 불러달라고 하는 대신 엄마는 미국에 있는 남동생 이야기를 꺼내더라는 것이다. 아들과 통화했더니 아들은 자기가 와야 할 상황인지를 묻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남편은 아들이 오는 게 제일 좋죠, 라고 대답했다 한다.
남편은 일정이 있어 나가고 잠시 후 내가 친정에 갔더니 아빠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혈압과 호흡이 정상이었다. 나는 아빠가 분명히 깨어나실 것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했다. 이런 일을 몇 번 당하고 나니 예지력까지 생겼다. 엄마는 간병인 이야기, 병원 이야기를 하시며 삼촌이 오시면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삼촌을 기다릴 필요가 뭐 있냐며 엄마가 결정하시라고 했다. 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당신이면서도 핑계할 사람을 필요로 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또 남동생 이야기도 꺼냈다. 자기가 와야 될 상황이냐고 동화가 묻는데 대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놈의 질문, 질문, 질문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을 못하고 ‘네가 오는 것이 좋겠다’고도 말을 못하는 두 모자의 비겁한 태도에 혐오감이 일었다. 역시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저에게 묻지 마세요, 하지만 제가 엄마라면 아들을 부를 거예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지금 미국이 몇 시냐고 해서 한밤중이겠지만 일어나면 전화하라고 문자 남겨놓으라 했더니 금방 문자를 쓰셨다.
엄마가 또 신세타령을 시작했다. 당신들이 잘못 살아온 것 같지 않은데 자신의 노년이 왜 이렇게 비참하냐는 것이었다. 왜 아빠 옆에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아빠 정도면 비참한 게 아니에요, 부인이 먼저 돌아가셔서 자식 눈치보고 살거나 혼자 살아야 하는 남자 노인들이 불쌍한 거지 부인과 함께 살다 돌아가실 수 있는 아빠는 행복한 거예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아빠가 이렇게 잠만 주무시는 것은 엄마가 늘 기도했던 대로 자는 잠에 가시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않아요? 엄마 기도대로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신세타령을 해서 떠나는 아빠 마음을 불편하게 하세요”라고 했다. 엄마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님을 나는 안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서 엄마가 듣고 싶은 말을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공감과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얼마나 외롭고 힘드세요? 엄마가 있어서 아빠는 행복하지만 엄마의 희생이 너무 크네요’라든가 ‘아빠가 자는 잠에 가시도록 기도했어도 막상 잠만 주무시니까 불안하고 겁나시지요? 우리가 옆에 있어드릴게요’ 같은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평생 나에게 공감의 말을 해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하면 당신은 얼마나 더 힘들겠느냐는 말만 했던 사람,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하소연 따위는 하지 않고 살아왔다.
“아빠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아빠 옆에서 신세한탄하지 마세요. 아빠가 편히 가실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라!” 하셨다. 그래서 알겠다고 말하고 나와 버렸다. 삼촌이 곧 오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걱정되지 않았다. 잠시 후 삼촌께 카톡으로 연락하니 이미 도착하셨고 아빠도 깨어나서 식사를 하셨다고 했다.
남동생은 엄마의 문자를 받은 후 내게 전화를 했다. 작년에 다녀간 후 1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자기가 와야겠느냐는 것이었다. 또 질문이다. 엄마한테 아빠의 상태에 대해 분명 들었을 것이면서도 판단은 나보고 하란다. “내가 너라면 들어올 거야”라고만 했다. 그랬더니 ‘그럼 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국자는 특별관리를 한다던데 공항에서 집까지는 어떻게 가는지, 핸드폰을 구해줄 수 있는지를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걱정거리라고 근심하는 꼴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네가 온다고만 하면 얼마든지 알아봐줄게. 방법이 있으니 다들 입국하는 거 아니겠니”라고 했다. 동생의 말투는 엄마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소름이 끼쳤다. 질문에 대답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 대화, 자기 의사라곤 없는 수동적인 태도, 세상일에 모범답안이 있다고 믿는 답답함. 그러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답만 듣고 싶어 하는 간교함.
남동생이 온다 한들 신천지가 열리지는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의 희비극을 잠시 중단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은 할 것 같았다. 동생이 입국하기까지의 며칠이 조용히 지나가고 동생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동생은 오자마자 폰이 금방 꺼질 것 같은데 충전 잭을 못 찾고 있다며 엄마집으로 바로 갈 수도 있으니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데이터가 부족할 것 같아서 문자로 보내준다고 해도 기어이 말로 알려달라고 하더니 #*ㅇㅇㅇㅇ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시간을 한참 낭비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엄마와 동생과 계속 대화하다가는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 해외입국자로서 집으로 바로 올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쓸모없는 걱정에 시간을 소모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전의 격리시설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문을 열지 못하게 해서 답답해 죽겠다며 엄마 집으로 가면 안 되겠느냐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화상 독서모임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다. 엄마가 보낸 문자에는 동생이 집에 오고 싶어 하는데 동생 때문에 엄마 아빠까지 같이 격리할 수는 없으니 본인들이 계룡스파텔에 들어가 있겠다고 써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멘붕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부모님 집에서 지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제정신을 갖고 있던 엄마는 함께 있는 것은 안 될 일이라는 생각 정도는 했던가 보다. 나와 함께 있던 지인은 내 말을 듣고 동생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고 했다. 아프신 아빠가 호텔에서 지내는 것도 가당치 않으며 부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는 것도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호텔에 계시면 식사도 문제고 재가요양서비스도 받지 못한다.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면 나의 사생활이 완전히 없어지고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 부모님과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남편은 아빠를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도 제안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동생을 강제격리시키지 않으면 분명 집 밖을 나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이면 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아이라면 집에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마트나 카페에 가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것이다.
동생에게 직접 이 말을 들었으면 나는 분노를 폭발시켰을 것이고 사태가 어떻게 악화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질병본부에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취약한 노인들과 동생이 함께 있는 것이 불가하니 동생에게 엄격한 통제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집으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지만 지자체마다 정책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며 격리시설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시설담당자는 동생이 퇴소 가능성을 문의했었지만 현재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 동생이 가장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못 해’와 ‘안 해’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생이나 엄마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없었던 과거에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만 했다. 인간심리를 공부하고 상담을 한지 20년이 되고 보니 동생의 성격장애가 더 악화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다 없다. 15년간 만나지 못하고 살아서 이 정도까지 심각해진 것을 알지 못했다. 작년에 와서 5일간 아빠 옆에 있을 때는 금방 끝날 일이라 생각하고 자기를 억눌렀을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상냥한 아들 노릇을 하고 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생의 기행을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격리시설에 있기로 했다고 해서 한숨 돌렸더니 맨 바닥에 요만 깔고 자려니 등이 배긴다며 침대가 있는 다른 격리시설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유성구에 있다는 그 시설은 방이 더 작다고 하여 고민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도 질문의 형태로 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상의를 해오는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시작되는 말을 들으면 혐오감이 몰려온다.
동생은 일단 버텨본다며 두꺼운 요를 갖다달라고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삼단요였지만 그것은 집에 있지도 않거니와 샀다가 안 쓰면 대형쓰레기가 된다. 그래서 일단 좀 두꺼운 요를 갖다 주었다. 두꺼운 요 외에도 동생은 전기스탠드를 요구했다. 책을 보려고 그러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고 전등을 끄면 너무 깜깜해서 무섭다고 했다. 그것이 환갑 다 되어가는 인간이 하는 말이었다. 밥만 주고 간식은 안 준다며 한국 빵이 먹고 싶다고도 했다. 동생이 원하는 물품들을 챙기며 이것 말고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문자로 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물건도 필요하지만 자기와 하루 한 번씩 통화해달라고 했다. 대화 나눌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아들이 왔다고 마음 놓으며 2주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음날 코로나 검사 음성판정을 받았고 결국 유성구에 있는 시설로 옮기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새로 옮긴 방 사진을 찍어 보내왔는데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본인도 만족스럽다고 했다. 앞으로 무슨 불평거리를 만들어낼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불평제조기로서 아빠와 동생은 판박이로 닮았고 사람을 초달하는 걸로는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동생이 요청하지 않았지만 최근 신문과 책 두 권을 갖다 주었다. 동생에게 주는 책은 특히 신경 써서 골라야 한다. 책의 메시지가 뚜렷하면 강요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른 것이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와 김요한의 <어린 아이처럼>이었다. 둘 다 일인칭으로 쓰여진 이야기인데다 포시는 40대 후반에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 거부감이 덜할 것이라 생각했다. 김요한은 특히나 강요가 없는 겸손한 문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덜하다고 생각되었다.
동생의 말에 엄마는 자동으로 반응했고 나 또한 엄마의 말에 그렇게 했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떼를 쓰면 즉각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 엄마의 방식이었다. 친정 동생들의 가장 노릇을 하던 엄마의 젊은 시절에 시작되었을 이 방식은 할 일은 많고 아이들은 말을 안 들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외할머니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모르셨다. 남동생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늘 큰 소리로 울거나 떼를 썼다. 그래서 맞기도 많이 했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동생이 의사소통 방식은 그렇게 떼를 쓰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 방식이 잘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떼 쓸 대상이 없어졌고 오히려 자신의 아이들이나 환자들이 자신에게 대항했을 것이다. 그래서 2년이 멀다 하고 병원 문을 닫았다 열었다 했을 것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시작하면 문제가 없어지고 삶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니 직업과 나라를 바꿔보기로 한 것이었다. 환자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의사보다는 교수가 되고 싶었던 것이고 부모의 시선을 늘 의식해야 했던 한국 보다는 먼 나라가 좋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결혼하고 사는 조카, 그러니까 동생의 큰딸은 자기 아빠가 미국에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왜 미국에 계속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대외적인 명분은 선교였다. 그러나 15년째 열 명도 전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속이고 있어서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나의 엄마 또한 남의 체면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행동의 진짜 이유는 감추고 남들에게 말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를 늘 찾아냈다. 엄마는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남을 믿지 못한다. 나는 엄마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화도 나지만 연민도 느낀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거기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늘 돌보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동생과 돌볼 대상이 필요한 엄마의 공생관계가 바야흐로 다시 시작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