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
사흘이면 뭘 할 수 있을까.
두툼한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고, 짧은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겠다. 작심도 삼일이라 했던가. 그런데 캐나다에서 사흘은 온타리오를 겨우 벗어나는 시간이다. 같은 주 안에서도 시간대가 달라질 정도로 방대하다.
토론토에서 옆 주 매니토바까지 꼬박 스물네 시간. 하루 여덟 시간씩 운전해도 사흘이 걸린다. 그런데도 밴쿠버까지는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의아해진다. "이게 정말 한 나라 맞아?"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눈앞의 호수는 바다만큼 넓었다. 수평선이 보였고, 파도가 출렁였으며, 갈매기와 수상택시가 오갔다. 심지어 건너편은 미국이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되묻는다.
"이게 바다가 아니라고?"
무려 25만 개의 호수를 품은 온타리오. 세계 담수(freshwater)의 5분의 1이 여기에 있다. 통계로는 인구 60명당 하나꼴이지만, 일상에서는 그보다 훨씬 자주 마주친다.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큰 네 호수가 그만큼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호수 대부분은 여전히 야생 상태로 남아 있다.
온타리오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차로 서너 시간이면 이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이다. 숲, 암석 지대, 습지로 이루어져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축은 보이지 않고, 가끔 무스나 엘크를 만난다. 휴게소도, 가로등도, 음료수 하나 사 마실 곳도 없다. 막상 주유소가 보여도 문이 닫혀 있다. 집을 떠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인터넷이 끊긴다.
'온타리오, 정말 크고 황량하구나.'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이 황량함이 오히려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저마다 그 속으로 흩어지고 싶어 한다. 온타리오의 광대한 면적 중 실제 거주 지역은 극히 일부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미국 국경과 가까운 남쪽에 몰려 있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토론토 광역권에 산다. 빽빽함을 견디며 빈 공간을 꿈꾸다 보니 별장 문화가 발달했다. 충분히 넓은데도 사람들은 더 큰 여백을 원한다. 땅의 규모가 욕망의 모양새까지 결정짓는 걸까. 높이 올라가는 대신 넓게 펼쳐지려 한다. 어떤 나라는 부를 모아 도심 속으로 파고들고, 어떤 나라는 도심으로부터 벗어난다.
언젠가 개인 소유의 섬에 별장을 가진 사람에게 초대받은 적 있다. 프라이빗 아일랜드라니, 기대가 부풀었다. 근사한 저택과 화려한 소파, 럭셔리 요트를 상상했다. 도착해 보니 아주 작은 섬에 오두막 하나만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최소한의 것들로만 꾸려져 있었다. 사방은 온통 물로 둘러싸였고, 지천에 야생 블루베리가 널린 땅을 맨발로 디뎠다. 자연과 어우러진 섬에서 시간은 더디고 달게 흘렀다. 평온이 오래도록 곁에 있었다. 색다른 행복의 단면이었다.
가을이 오면 밋밋하던 대지가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없이 나를 들뜨게 하는 10월의 단풍에는 우리 가족의 오랜 역사가 묻어있다. 힘들었던 이민 초기에 한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놀이였다. 그때만큼은 앞날에 대한 불안도, 부모님 어깨를 짓누르던 돈 걱정도 잠시 잊은 채 실컷 웃었다. 다람쥐가 먹이를 저장하듯 총천연색의 풍경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지금도 해마다 단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10월 한철의 기억으로 긴 겨울을 버틴다.
흔히 '캐나다의 단풍' 하면 떠오르는 선명한 색은 거의 동부의 것이다. 진한 빨강과 주황, 노랑이 절묘하게 그러데이션을 이룬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손바닥만한 노을이다. 서부는 색이 옅고 노랑이 주를 이룬다. 내가 디딘 땅이 단풍국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남몰래 자랑스러워진다.
저마다의 색이 어우러진 숲은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하다. 호숫가를 따라 단풍이 타오르고, 물은 그 불빛을 거울처럼 담아 비춘다.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의 불꽃을 지나다 보면 색의 파도 속을 넘실대는 것 같다. 하나의 장관을 놓쳐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더 많은 장면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속 100km로 열 시간 넘게 달려도 숲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외진 북부 지역은 인파도 없어 계절을 온전히 독차지하는 기분이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북쪽에서 시작한 색의 향연은 몇 주 후 토론토 도심이나 동네 곳곳에 닿아 한동안 일상 속에 내려앉는다.
넓고, 흩어지고, 황량하고, 멋지다. 창밖을 보며 어느새 감탄이 튀어나온다. '온타리오, 참 아름답구나.' 아까의 한숨이 무색해질 만큼.
이곳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주하는 호수는 몇 배로 더 반갑다. 끝없는 프레리를 건너며 바짝 마른 목을 흠뻑 축여주는 듯하다.
마침내 경계가 가까워진다. 토론토, 온타리오, 그리고 그 너머로 공간의 겹을 하나씩 통과한다. 나무와 돌이 점점 사라지고, 오직 지평선만이 남는다.
"Yours to Discover"
온타리오 차량 번호판의 슬로건. '당신의 발견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24시간을 달려도 여전히 발견 중이고, 앞으로도 끝없는 탐험이 펼쳐질, 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인 온타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