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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리

있는 그대로의 충만

by 소라비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수평선. 그 끝을 채우는 게 물이 아니라 대지라면 어떤 모습일까.


프레리는 바다와 닮았다. 망망대해, 시야에 가득한 바다. 그러나 정작 그곳엔 물이 없다. 바다에서 물을 땅으로 바꾸면, 그게 프레리가 된다. 망망대해의 벌판. 한 편에서 다른 편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그 일직선 속으로 파도 없는 항해를 한다.


온타리오를 지나 매니토바(Manitoba), 그 옆의 사스카추완(Saskatchewan), 로키산맥 직전의 앨버타(Alberta). 이 세 주를 합쳐 프레리(Prairies)라 부른다. 그 이름을 평원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이 평원은, 하이디의 초원처럼 그렇게 아늑하지 않다. 면적이 한국의 20배에 이를 정도로 광대하다. 프레리를 통과하는 길이만 1,800km. 대초원이 멈추지 않고 스무 시간 넘게 펼쳐진다.


Trans-Canada Highway 1. 그 길을 따라 전봇대와 전선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마치 벽에 그어진 키를 재는 금 같다. 창밖으로 휙휙휙, 줄자처럼 지나간다. 프레리의 거리를 세는 유일한 눈금. 아이가 자라듯, 전봇대 하나씩 창밖을 스칠 때마다 평원을 조금씩 통과한다.

Prairie Dog. 평원에 땅굴을 파고 사는 다람쥐 닮은 동물.

잠시 내 시력이 좋아진 줄 착각했다.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주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간혹 말이나 소가 방목되어 있고, 하얗게 빛나는 소금 호수(salt lake)도 보인다. 매니토바의 원주민 예술, 사스카추완의 황금빛 밀, 앨버타의 광물 자원. 각 주마다 색깔은 있지만 프레리라는 거대한 캔버스 안에서는 모두 하나의 톤으로 흡수된다. 기억도 평평해지는 걸까. 계속 반복되는 풍경만 펼쳐지니 정지 버튼을 누른 화면 속에 갇힌 기분이다. 다섯 시간 전에 본 모습과 아홉 시간 후에 볼 장면이 모두 하나의 지평선에 묶여 있다.


프레리에서는 하늘이 더 크다. 온 세상이 납작해져 한 프레임 안에 모두 들어오는데, 땅은 아래쪽에만 살짝 깔렸다. 건물이 없어서 하늘이 채웠고, 사람이 없어서 대지가 빛났다. 쌓아 올리지 않아도 온전한 공간이 거기 있었다. 프레리에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전부를 보았다. 있는 그대로 충만했고, 지루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벅차도록 넉넉했고, 평온했으며, 아름다웠다.


매니토바에서 우연히 오로라를 만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해질 무렵 하늘이 흔들렸다. 처음엔 그게 오로라인 줄도 몰랐다. 하늘이 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연두가 흘렀다가 보라로, 다시 분홍으로 변했다. 빛이 제멋대로 펄럭였다. 마치 오로라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비워진 무대여서인지 더 맘껏 뛰노는 듯했다.


프레리는 흩어져 있다. 마을도, 사람도, 모든 것이. 여기 산다면, 조금 더 빨리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남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을 소유하려 애쓸까. 이미 하늘과 땅을 통째로 품었는데.


가도 가도 특별한 것 없는 평원. 문득 이게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원처럼, 살아도 살아도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비어있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아무것도 담아가지 않아도, 그저 지나쳐 가도 괜찮다고. 굳이 무언가를 이룩하지 않아도 된다고.

소란했던 위장을 밍밍한 흰 죽으로 달래듯, 뾰족했던 마음이 평평하게 펴지는 것 같다.


프레리는 흐른다. 물처럼.


차로 땅을 헤엄치다 보니 저 멀리 마침내 무언가 솟았다. 산이다. 지평선이 끝나고 새로운 시공간이 시작된다. 수평의 세계가 이제 수직으로 서 있다.




"As the crow flies"

직선거리를 뜻하는 표현이다. 까마귀가 날아가듯 장애물 없이 일직선으로 잰 거리.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as the crow flies로는 3,400km. 그런데 실제로 가려면 4,200km다. 산맥과 호수를 피해 돌아가야 해서 직선거리와 실제거리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


"Indigenous"

원주민을 뜻하는 말. 캐나다는 그들을 부르는 이름을 여러 번 바꿨다. Indian, Aboriginal, Native를 거쳐 이제 Indigenous다. 각각의 이름 뒤에는 잘못된 인식, 법적 분류, 모호한 경계가 있었다. 이 나라는 여전히 올바른 호칭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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