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조차 사치
"몇 시 곤돌라로 내려오실 건지 지금 정해주세요."
3,500km를 달려 드디어 도착한 밴프. 곤돌라 매표소 직원이 던진 첫마디였다. 거창한 환영까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표를 사기도 전에 하산 시간을 알려달라니. 황당했다.
Crowd Control. 전에 없던 절차다.
왜요. 그건 내 마음 아닌가. 위에서 얼마나 머물지는 가봐야 알 수 있는 건데.
잠시 발끈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결국 대강의 시간을 말했다.
그저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경계선 같이 느껴졌다. 당신 맘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고.
막상 올라가 보니 언제나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곳엔 감시도, 단속도 없었다.
프레리를 지나며 곧 산이 보일 거란 생각에 설렜다. 토론토에는 산도 바다도 없다. 바다는 호수로 달랠 수 있지만, 산의 부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산 없이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 빈자리의 무게를.
마침내 로키산맥. 하늘로 솟은 봉우리들. 햇빛에 반짝이는 눈 덮인 능선.
캐나다 로키는 1,450km에 걸쳐 뻗어 있다. 사람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구간은 밴프와 재스퍼 사이, 300km 미만. 논스톱으로 네 시간 거리다. 광대한 로키의 대부분은 여전히 야생 그대로다. 산 너머 또 산, 그리고 그 너머 더 큰 산들.
캐나다에서 관광지를 단 한 곳만 추천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로키라 하겠다. 하지만 방문할 때마다 규제가 늘어나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는 성수기에 하루 2,000대가 넘는 차량이 주차 제한으로 되돌려진다. 모레인 레이크(Moraine Lake)는 최근 개인 차량 진입이 금지돼 셔틀로만 들어갈 수 있다. 재스퍼 공원 초입엔 '230km no cell service' 표지판이 걸려 있다. 문명과의 단절을 선언하듯. 그리고 이제는 곤돌라의 이용시간까지 관리하려는 모양이다.
처음엔 불쾌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없다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이 나라는 간섭하지 않는다. 제지하지도,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저 묻고, 권고하며, 방향만 제시한다. 곤돌라 정상에서 아무도 검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약속을 지킨다. 못마땅해하면서도 연신 시계를 보며 정해진 시각에 맞춰 내려온 나처럼.
느슨해도 질서는 유지된다.
로키는 다르다.
차단. 금지. 제한.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던 캐나다가 좀처럼 쓰지 않던 용어를 여기에선 사용한다. 관대하고, 개입하지 않으며, 쉽게 사과하던 나라가 대자연을 위해서는 단호하다. 타협도, 양보도 없다.
흩어진 땅의 유일한 집중점.
세상 바쁠 게 없던 이들이 드물게 빠른 결단을 내린다.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환경이 숨 쉴 수 있도록.
로키 앞에 서면, 그 어떤 규제도 납득이 간다.
자연의 마무리 손길처럼 한 움큼의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산.
물의 호흡 같은 자욱한 물안개. 그 위를 헤엄치는 카누들.
빙하수가 만들어낸 초현실적 청록으로 나부끼는 호수.
산맥 사이를 리본처럼 휘감아 흐르는 강.
수천 년을 견뎌온 늠름한 빙하.
그리고 무심히 제 할 일을 하는 곰, 무스, 산양 같은 야생동물들.
프레리에서는 혼자만의 충만을 독차지했다. 로키에서는 함께 지켜야 할 장엄함을 나눈다.
산의 부재를 알기에 로키의 부재는 원치 않는다. 그래서 받아들인다. 예약도, 통제도, 번거로움도 기꺼이.
불평조차 사치인 땅. 로키.
산맥은 끝나고, 태평양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