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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컬럼비아 (BC)

선택한 느림

by 소라비

'이번에도 못 찾겠어. 토론토가 더 나은 이유.’

밴쿠버에 올 때마다 채점표도 챙겨 온다. 서쪽 여정의 마침표, 4,200km를 달려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토론토와의 상대 평가다. 비교 항목들을 하나씩 들춰보지만, 이 도시 앞에서는 변명만 길어진다.


차 번호판에는 'Beautiful British Columbia'라 적혀 있다. 온타리오처럼 '스스로 찾아보라(Yours to Discover)'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선언한다. 산과 바다가 있고, 사람들은 친절하며, 도시는 첨단이다. 완벽하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졌다.


바다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 시야에 펼쳐진다. 산은 로키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생활 속에 스며드는, 딱 그만큼이라 더 친근하다. 산이 굽어본다는 것. 그 눈길이 나를 한결같이 쫓아온다. 뿌리를 잃은 나에게 흙 한 줌을 내어주며 살포시 덮어주는 것 같다. 이곳에서의 내 시간을 오래 기억해 주는 것 같다. 오늘자 주민등록증을 건네받는 기분이다.


이 나라는 모든 게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는 예외다. 메트로 밴쿠버 어디서든 30분이면 산, 바다, 숲, 도심에 닿는다. 가깝다는 게 이렇게 사치스러운 것이었나.

Steveston & Belcarra

지리적으로 더 넓어질 수 없는 도시. 동쪽은 산, 서쪽은 바다. 그래서 밖이 아니라 안으로 모인다. 사람도, 자연도.

페리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섬들은 시간이 몇 박자 더 느리게 흐른다.

Victoria

토론토 사람들이 주말마다 두세 시간 운전해 별장으로 가는 동안, 밴쿠버 사람들은 집 앞 산책로를 걷는다. 멀리 소유하는 대신 가까이 누린다. 자연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를 선택한다. 우리 부모님처럼.

English Bay
Stanley Park

엄마 아빠는 토론토를 떠나 이곳에 정착하셨다. 따뜻한 기후와 한국과의 접근성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숨어 있었다.


아빠는 영어가 서투르시다. 연세가 드시면서 병원과 약국에 갈 일이 잦아졌다. 약 봉투를 들고도 불안해하셨다. 어떤 약을 언제, 몇 알 먹는지 설명을 들어도 금세 잊으셨다.

약이 늘어나자 약사가 약 차트를 만들어 주셨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과 저녁 약을 한 칸씩. 색색의 약들이 플라스틱 칸마다 빼곡했다. 차트를 내밀며 이해할 때까지 천천히,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뒤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약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음 사람을 불렀다.


엄마는 매일 동네 커뮤니티 센터에서 수영을 하신다. 여러 번 따라갔다.

헤엄치다가 옆 레인을 봤다. 휠체어에서 풀로 이동하는 사람, 물을 처음 만지듯 낯설어하는 사람, 보조 기구를 낀 사람. 지적장애인과 신체장애인들이 각자의 보호자들과 즐기고 있었다. 전용 공간이나 시간은 따로 없었다. 그냥 섞여 있었다. 빠른 사람은 추월하고, 느린 사람은 천천히 갔다. 안전요원들이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누구도 구석으로 밀려나지 않는 장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나는 거기서 처음 봤다. 그들의 환한 얼굴. 울컥했다.


산과 바다가 사람들을 바꾸는 걸까? 아니면 느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밴쿠버를 선택한 걸까?


여러 주를 지나며 섣불리 결론을 내렸다. 넓어서 느릴 수밖에 없다고. 온타리오는 너무 커서, 프레리는 끝이 없어서, 로키는 접근이 제한되어서. 환경이 느림을 강제한다고 단정 지었다.


밴쿠버가 그 가설을 흔들었다. 여기는 산과 바다로 에워싸인 지리가 성장에 브레이크를 건다. 몇 개의 다리로 연결된 도시라 날씨 하나에 도심이 멈춘다. 자연이 모든 계획을 바꾼다. 하지만 그 제약을 문제로 두지 않는다. 자연에게 상석을 내어주고, 사람의 일들은 그다음 차례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느림을 선택하고, 그 여유를 사람에게 건네는 곳.


도착해서 처음 며칠간은 늘 어리둥절하다. 이렇게까지 인간적이어도 되나 싶어서. 토론토니언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람에 집중한다. 토론토가 특별히 불친절한 건 아닌데, 온도가 다르다. 부모님은 이걸 원하신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밴쿠버를 선택할까,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토론토가 더 좋다. 템포가, 일자리가, 다양한 문화가 나를 끌어당긴다. 어정쩡한 영상의 날씨보다 햇빛 쨍한 영하 20도를 선호한다. 아무래도 난 대자연보다 대도시에 있을 때 더 나 같다. 아직은.


부모님은 밴쿠버를, 나는 토론토를.

이 나라는 도시마다, 주마다 리듬이 달라서 각자 자기 속도에 맞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채점표는 그만 접고 대륙을 가로지른다.

다른 언어가 흐르는 땅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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