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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l 21. 2024

달라의 교환일기 - 세 번째 2

우리는 자기 검열 없이 구차할 정도로 징징거릴 필요가 있어요

Dear. 소라


오, 몸에 대한 이야기라니, 천일야화도 부족합니다! 몸, 하면 솔직히 한숨부터 나오긴 하는데요.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 몸 이야기를 세상에 토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자기 검열 없이 구차할 정도로 징징거릴 필요가 있어요.


누구나 ‘몸의 존재’겠으나 특히 저에게 몸이란 평생의 징벌이자 화두라 할 수 있죠. 오죽하면 몸 이야기로 책을 냈겠어요.(‘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건강하지 않은, 흉한 몸을 가진 여자로서 몸이 내 삶에 장애가 될 때마다 저는 몸을 죽도록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몸이 곧 나’라는 자각을 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혐오의 늪에 오래도록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 몸과 나는 분리되고, 불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건, 애당초 가능한 일인가요? 미디어엔 온통 당을 끊고 필라테스하면서 바프 준비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몸을 ‘만들’고 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데, 다르게 말하면 몸이 뚱뚱하고 근육이 없을 땐 자존감도 떨어진다는 뜻이겠죠? 예쁠 때만 존엄해질 수 있는 드러운 세상, 씨발!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인성도 예뻐지긴 글렀네요. 


사람들이 몸과 외모 가꾸기를 자.기.관.리.라 부를 때마다 사기당하는 느낌이에요.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보면 우리는 이미 ‘자기’를 잃었고, 기계가 아닌 몸이나 마음을 ‘관리’하기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죠. 더구나 ‘관리’야말로 계급적입니다. 좋은 유기농 음식을 먹고 훌륭한 PT 강사에게 훈련을 받으면서 내 몸에 돈과 시간을 집중투자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사회의 잣대에 맞추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관리’가 아니라, ‘학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장애가 된 것은 내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이 사회의 폭력적, 나아가 학대적인 시선과 요구였습니다. 몸을 둘러싼 상처를 돌아보고 그것을 글로 쓰면서, 저는 내 몸을 혐오했을 뿐 아니라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도 함께 미워하고, 비난해 왔음을 깨달았어요. ‘정상(건강)-완벽-아름다움’의 도식이 몸의, 특히 여성의 몸에 유일한 가치일 때 차별과 불이익을 넘어 죄책감까지 지게 되는 건 정말 잔인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소라는 사랑에 대한 저의 열정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뻗어 나오는 에너지라 보는 듯했는데요. 저는 그동안 반대로 생각했답니다. 내가 나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기에 바깥에서 사랑을 찾아 떠돈다고. 텅 빈 나를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을 대면하고 껴안기 두려워 다른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자신을 회피하는 거라고요.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존재에 매혹되고 그를 사랑해 버리는 게 훨씬 빠르고 쉬웠습니다. 


이상하게도 드라마 속 멋진 연예인이나 쇼츠의 귀여운 고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순순히 지갑을 여는 건 한순간이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평생의 과업입니다. 나는 늘 나와 거리를 두거나 싸우거나 나로부터 도망 다니는 느낌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삐죽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꼭 자신을 사랑해야 하지? 365일 24시간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상대가 그 누구여도, 감정은 늘 변하니까, 사랑할 때도 미워할 때도 그저 덤덤할 때도 있는 건데. 뭐 이렇게 애써서 나를 좋아하려고 하나. 



몸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 그렇게 출렁이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내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이슈에 어떤 강박을 갖게 됐나 돌이켜 보니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의 영향도 있더군요. 완벽한 몸에 대한 신화와 더불어 자기애(“Love Yourself”)나 몸 긍정주의(Body Positive) 캠페인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진 지 오래인데요. 


좋은 의도인 건 알지만 아무리 봐도 별로인 나 자신과 내 몸을 어떻게 사랑하고 긍정하라는 건지, 좀 삐딱하게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외치는 셀럽들이 하나같이 수려한 걸 보면 마음이 더욱 삐딱해지다 못해 빈정거리게 되죠. ‘넌 당연히 너를 사랑하겠지, 온 세상이 너를 사랑할 텐데.’ (저의 인성이 예뻐지긴 정말 틀린 것 같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오”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시오” 그런 주문이나 자기 암시는 공허한 메아리 같아, 힘을 잃기 쉬워 보여요. 또 이런 사고방식은 불행한 감정이 나를 덮쳐올 때 이게 내 자존감이 부족해서인가, 부정적인 내 성격 탓인가, 자책과 자괴감까지 더해지게 만들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생각해요. 순풍이든 태풍이든 여러 바람이 오가는 창문처럼 나에 대한 다양한 감정을 그저 통과하게 두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으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자신에 대한 사랑은 혼자만의 의지나 노력으로 가능하기보다, 타인 혹은 어떤 존재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돋아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글쓰기 모임을 하며 그런 촉촉함을 느끼곤 했어요. 특히 성폭력 생존자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내가 이 일을 하러 이 세상에 왔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활동의 목적을 달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은혜롭게 느껴진 순간들이 벅차게 다가왔거든요. ‘보람’과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오래전 SNS에 올린 게시물을 우연히 보다가, 거의 10년 전쯤인가 지역 중학교에서 타로 집단 프로그램을 했을 때 학생들이 소감에 “달리샘 사랑해요”라고 쓴 걸 다시 발견했어요. 처음 그 문구를 받았을 때도 뭉클했지만, 지금 다시 봐도 어찌나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던지. 그때 집단상담 과정이 정말 지난하고 힘들었거든요. 제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경계하던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 몇 달이 걸렸어요.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에 그 모든 시간과 기다림을 보상받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가 느낀 사랑은 완벽하고 멋진 상태와 거리가 멀었어요.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낼 만큼의 신뢰가 생겼을 때, 이 세상에 나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 알아줄 때, 그 이상함을 기꺼이 안아주는 사람이 될 때- 사랑은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땅 밑에서부터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번 생은 ‘힘든 이야기를 수집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해요. 제가 처음에, 징징거리자고 했잖아요. 이 편지도 징징거림을 고이 접어 보내는 거랍니다. 우리 징징거림과 험담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귀한 글친구가 되어줍시다!


변덕스러운 비가 내리는 시절, 달리가    


*이미지는 책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에 사용된 것입니다. (일러스트 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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