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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l 28. 2024

달라의 교환일기 - 네 번째 1

근근이 살기도 힘든데 꼭 멋져야 하나요?

달리에게


  달리의 세 번째 편지를 받은 날은 마침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있었어요. 친구와 나는 자기 관리에 대해서, 몸무게에 대해서 그리고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거든요. 어쩜 이런 동시성이 있나요? ^^ 


 달리의 편지를 받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밑줄치고 싶은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답니다. 저도 자기 관리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심술이 나곤 했어요. 자기 관리는 경제적 자원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요, 식단을 시작하고 체지방을 체크하며 운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기 관리 자기 돌봄도 참 자본주의적으로 하는구나, 했답니다. 시간과 돈에 쫓기면 할 수 없는 방식을 미디어는 매일 보여주는데요, 시간은 많아도 돈은 없는 제가 전혀 자기 관리가 필요 없어 보이는 출중한 외모의 여성을 이불속에 드러누워 과자를 씹으며 봅니다. 연신 저건 외모 강박이야 하면서 말이죠. 먹는 것 앞에서 칼로리를 먼저 계산하고 먹은 만큼 푸시업과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 부정적이고 삐딱해집니다. 그런데 좀 삐딱하면 어떤가요? 그 삐딱함으로 저는 저를 지켜내는 중입니다. 


에고가 과대하게 부풀려진 자기애 과잉의 시대에 자신을 사랑하란 말은 어떤 최고치의 자아를 설정해 놓고 그 한 곳으로 매진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서로 다른 개성의 사람들을 사회가 원하는 매끈한 규격의 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적절한 근육을 가진 표준치의 몸과 긍정성을 담뿍 얹은 표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하면 좀 무섭기까지 해요. 그래서 역시나 부정적인 저는 ‘자기 관리’라는 말이 참 맘에 안 들어요. 


예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오는 참가자에게 엔터의 대표이자 심사위원은 건강관리도 자기 관리이고 능력이라면서 프로는 중요한 오디션을 앞두고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고 잘난 체하며 말하더라고요. 능력으로 아프지도 말라니 별꼴이지 뭡니까. 뮤지션이 꿈인 그 어린 참가자는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을까요. 


제가 자기 관리라는 말이 싫은 이유는 관리라는 두 음절 속에 숨어있는 ‘능력’이라는 말 때문일 거예요. 저에게 자기 관리의 능력은 주류 혹은 정상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같습니다. 전 자주 저의 능력 없음에 대해 실의에 빠지곤 하는데요, 저에게 능력은 성실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사람, 돈을 버는 사람, 그래서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사회가 정한 규범과 성취를 차근차근 해내는 사람들 말이죠. 


저는 제가 이 규범과 성취를 한 번도 이룬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 같았어요, 그런데 세상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하니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전 멋진 여성, 멋진 사람이 되긴 애초에 글렀군 싶었지 뭐예요. 사실은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저는 길고 긴 서두를 쓴 것 같아요. 그런데 근근이 살기도 힘든데 꼭 멋져야 하나요?


앞서 말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동안 엄청 인기를 끌었는데요, 저는 어린 참가자들보다 인생 2회 차에 접어든 나이 든 참가자들에게 마음이 갔어요. 저들은 저 나이가 되도록 돈이 되지 못하는 노래를 하면서 어떻게 (밥벌이를 하면서) 살았을까? 저들은 자신의 음악을 하기 위해 (세상의 수모를) 어떻게 버텼을까?를 혼자 상상합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성공한 유명 작곡가, 프로듀서, 가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장년의 무명 뮤지션을 보면 예술지원서나 창작지원서를 쓰고 저보다 젊은 심의위원 앞에서 면접을 보는 저 같아서 더 감정 이입이 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저렇게 많은 무명의 예술가들이 저 나이에도 자신의 꿈을 그냥 일상으로 여기며, 일상 속에서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이상한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꿈이 멀고 높이 있는 원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걸 무명의 가수들이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죠. 



잘나고 멋진 사람,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빛나는 사람보다 빛나지 않아도 그저 자기 방식대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될 거 같아요. 길은 여러 갈래 길인데 오직 한 길만 정답처럼 여겨지는 건  길들에게 예의가 아닌 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저에게 먼저 그런 예의를 차려야 할 거 같습니다. 달리가 말한 창문을 오가는 여러 바람처럼 자신을 수용하는 방법이 어쩌면 이런 예의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은 엄청나고 대단하고 무지막지하게 설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저에겐 일단 잘 들어주는 일이랍니다. 마치 달리와 제가 서로의 편지를 읽어주는 것처럼요. 

그래서 더욱 ‘자기 검열 없이 구차할 정도로 징징거릴 필요’가 있다는 말은 저에겐 용기를 줍니다. 무얼 써도 괜찮을 거 같고 좀 못나도 될 거 같아서 마음이 놓입니다. 

이번 생은 ‘힘든 이야기를 수집하는 사람’으로 남을 거 같다니 그저 대단하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응원을 해야 할지 잠시 먹먹했는데 아무려나 저는 계속 달리에게 편지를 쓰려고요. 


그리고 글친구라고 불러주니 참.... 감동입니다. 


징글징글하게 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소라 드림 

*사용한 이미지는 이사벨 비숍(1902 - 1988 )의 친구 (1942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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