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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l 25. 2024

천은 저수지엔 언제 갈까

매화향기와 함께 걸었다

  지리산 아래 동네 내가 서 있는 마당의 어둠은 짙고 고요했다. 아궁이 앞을 떠나 방의 한기는 가셨는지 살피러 들어가니, 집 안에 던져둔 모바일 폰엔 친구의 전화와 문자가 여러 차례와 있었다. 그제야 친구와 통화를 했다. 얼마 후 친구가 도착했다. 허술한 젓가락 열쇠를 치우고 대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탓에 친구는 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아니라 내 집 마당에서 친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아직 연기가 가시지 않은 마당에서 친구에게 한바탕 군불 때기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친구는 곧장 아궁이로 가더니 장작과 책 한 권을 통째로 던져 넣고 부지깽이로 몇 번 뒤적이며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찬장의 냄비를 꺼내고 냉장고를 열고 가스 불을 켰다. 연속된 동작 사이사이 내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 추운 집에 내내 있었던 나를 걱정하며 티베트식 콩 수프를 끓이고 빵을 자르고 과일을 깎았다. 친구의 콩 수프는 맛나고 이야기는 더욱 맛있었다. 내가 혼자 동네 마실을 다녔다고 하니 친구는 천은 저수지에 가보라고 했다. 지리산 천은사 아래 저수지 풍경을 꼭 보라고 말이다. 


 결국 군불을 땐 방이 아닌 친구 방에서 자기로 했다. 군불을 땐 손님방은 방바닥만 미지근할 뿐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불을 깔고 누워도 친구의 오 년 동안의 이야기는 하염없었다.  농약을 치지 않는 친구에게 쏟아지는 각종 훈계와 사백 평 농사를 포기한 이야기, 혼자 사는 여자에게 쏟아지는 여러 억측과 소문들, 면사무소와 기타 등등의 알바 이야기에 배꼽을 잡다가 한숨을 쉬다가 다시 웃었다. 어디에나 있는 진상들 사이에 또 어디에나 아름다운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라 친구의 옆집 할머니와의 우정은 정답고 따뜻했다. 옆집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친구의 결혼 여부도 내려온 내력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보다 말년엔 친구와 더 자주 밥을 먹은 할머니는 장 담그는 법과 각종 장아찌의 비법과 농사일을 알려줬다. 그러다 광주의 요양병원으로 떠나셨는데 코로나로 병원을 폐쇄해서 결국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는 옆집 할머니가 자주 그립다고 했다. 


 

 다음 날 친구는 다시 일하러 읍으로 나가고 집에 남은 나는 천은 저수지를 찾아갔다. 지도 검색으로 길을 찾아가는데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듣고 바람이 불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데도 몇 번 길을 돌아 나왔다. 산속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엔 드문드문 관광버스만 지나갈 뿐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헤매느라 버린 시간과 가고 오는 길의 시간, 시외버스 시간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천은 저수지는 무리 같았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다시 마을로 내려와 지도가 알려 주는 가까운 저수지로 갔다. 친구의 마을을 지나 길 하나를 건너가니 여기나 저기나 산수유나무가 숲을 이루고 매화 향기가 흘러 다녔다. 마을을 지나는 내내 사람대신 매화향기와 함께 걸었다. 천은 저수지 대신 간 곳은 방광 저수지였다. 아직 떠나지 않은 철새인지 아니면 텃새인지 새들이 후드득 날아갔다. 저수지의 가둔 물빛은 흐리고 하늘도 흐리고 지리산 자락은 물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고 있었다. 여행에서의 마지막 날, 홀로 찾아 간 시골 마을의 저수지. 늘 이렇게 매일 산책을 다니며 이 마을에 산 것 같았다. 


 고작 나흘을 떠났다가 집으로 왔다. 낯선 잠자리에서 잘 자고 매 끼니를 잘 챙겨 먹었다. 찬란한 봄날 자연 앞에 경이로운 순간도 없이 슴슴한 여행이 끝났다. 서울에 오니 오랜만에 생계용 일감이 들어왔다. 밥을 짓고 일을 하고 업무용 미팅을 다녀오고 다시 밥을 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한동안 일이 없어 불안한 마음이 돈 버는 일을 시작하니 그만 괜찮아졌다. 먹고사는 일처럼 내 감정을 흔드는 일은 없구나, 그런데 나는 언제 천은 저수지에 갈게 될까? 천은 저수지도 섬진강도 오래 바라볼 날은 또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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