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멋대로 피는 꽃들
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꽃을 가꾸는 분들이 많다. 담장 위 가지런히 화분을 줄지어 놓고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여러 종류의 꽃을 피운다. 좁은 마당에선 넝쿨장미가 피어나고 골목길에 내어 놓은 고무 다라에서는 푸성귀가 자란다. 골목길을 지나다니며 피고 지는 꽃을 보는 것은 산책에서 누리는 호사 중 하나이다. 그러다 얼마 전 골목길 담벼락에 붙은 벽보를 보게 되었다. 모월 모날 정오 무렵 꽃을 훔쳐간 이를 형사고발하겠다는 경고장에는 cctv 화면을 캡처 한 사진이 있었다. 훔쳐간 화분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지 않으면 경찰에게 cctv 영상을 넘겨서 끝까지 추적해 잡겠다는 어마 무시한 벽보 속 사진의 주인공은 지팡이를 짚은 여성노인이었다. 정성스레 가꾼 화초가 없어져 화나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번듯한 이층 집에 살며 꽃을 가꾸는 사람보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늙은 여성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종종 들러 정보를 검색하는 한 인터넷 카페에서도 동네 화분이나 자잘한 물건들을 훔치는 노인들에 대한 성토가 있었다. 원 게시글 아래 달린 댓글에는 노인에 대한 혐오의 말들이 넘쳐났다. 더 정확히는 늙었는데 게으르고 무지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멸시였다. 그 댓글을 쓴 이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도덕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용산에 사는 윤 모 씨 덕분에 내 나이가 쉰다섯에서 한 살을 뺀 쉰네 살이 되었다. 쉰다섯이나 쉰넷이나 도긴개긴이다. 책임은 날로 커지는데 나이 든 만큼 성숙해지기보다 정신도 몸도 빨리 방전된다. 젊어서 무시하던 몸의 신호들이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켜서 종양을 떼어내거나 뇌출혈이 와 직장에서 쓰러지거나 갑자기 하루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 온갖 검사를 받은 선배도 있다. ‘꼰대’ ‘라떼’ 라고 조롱당하는 내 또래들은 다 여기저기가 아프고 걱정이 많다. 유병 백세 시대에 은퇴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식들은 아직 공부 중이고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자리 잡기 쉽지 않은 아이의 삶까지 머리에 이고 지고 다닌다. 한편에선 병원 치례가 잦아지는 늙은 부모 돌봄에 다들 마음과 몸이 고단하다.
현실의 걱정과 시름을 잊고 싶어서인지 이 중년의 사람들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 그리기를 좋아한다. 중년의 여성들은 다들 꽃을 보면 반가워 사진을 찍고 드로잉 모임에 와선 그 꽃을 그린다. 드로잉 모임에 오신 한분은 시드는 나이가 되니 꽃이 좋아졌다고 했다. 올봄에는 중년 남성 두 분이 계속 드로잉 모임에 참여하는데 이 분들도 sns의 프로필 사진이 꽃 사진이었다. 중년의 여자와 중년의 남자는 갱년기를 맞이하여 각자의 성호르몬 수치가 낮아지자 비슷해진 것 같았다. 짝짓기 호르몬이 시효를 다하자 인간이 아닌 자연이 보이는 걸까. 그럼 꽃을 그릴 만한 문화적 자원을 갖지 못한 여성노인은 꽃을 훔치는 건가 하는 하릴없는 생각을 계속하는 중인데 동네 할머니랑 꽃 그리기 수업을 해볼까 싶기도 하다.
젊은 날엔 꽃이 주제가 되는 그림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그림, 그저 예쁜 것을 그리니 예쁜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더 솔직히는 유한마담들의 취미에 맞춘 그림이라 맘속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성차별적이며 중년 여자에 대한 혐오가 묻어나는 생각을 젊은 여자인 내가 했었다. 그런데 이젠 나도 꽃이 좋다. 산과 들은 물론이고 동네 골목길 담벼락에서, 보도블록 틈에서도 피고 아스팔트도 뚫고 올라와 피는 씩씩한 꽃들이 좋다. 잘 가꾼 화분의 탐스런 꽃도 좋지만 여기저기 멋대로 피는 꽃들이 좋다. 화사하게 모여 피어있는 장미 울타리 아래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장미를 보다가 문득 나는 꽃도 비주류가 더 좋구나 싶어서 혼자 웃었다.
그런데 화분을 가져간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쪼록 경찰이 아주 매우 바빠서 동네 꽃 도둑을 추적할 경황이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