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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Aug 15. 2024

여름, 부고 하나

 세상이 알려 준 방식대로 살아내려다

  이른 장마처럼 추적추적 여름비가 내리는 날 부고를 받았다. 나보다 한 살이 적으니 죽음을 전하기엔 이른 나이에 후배가 떠났다. 스무 살 시절부터 욕심이 많아 보이던 그 아이와 나는 잘 맞지 않았다. 사실은 자기 욕망에 거리낌 없던 그 아이와 같은 학번의 후배들이 나는 다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졸업 후 그 아이와 다른 후배들을 굳이 만날 일이 없었다. 잘 산다는 소식만 드문드문 전해 들었다. 그러다 꽤 시간이 흘러 잘 나가지 않던 동문 모임에 오랜만에 나갔더니 그 아이가 있었다. 미국 유학 후에 다들 보고 싶고 궁금해서 나왔다는데 한국에서 자리 잡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선배나 동기들을 붙들고 ** 대학의 누구를 아느냐, 그 사람을 소개해달라고도 했다. 나는 속으로 저 아이는 참 여전하구나 싶었고 그래도 힘들게 공부하고 왔으니 잘 됐으면 싶었다. 


 다시 몇 년이 흐르고 나와 친한 선배언니에게 그 아이가 요즘 어떠냐는 좀 뜬금없는 전화를 받았다. 선배와 그 아이는 근황을 물을 만큼 친분이 없어 의아했는데 선배가 일하는 언론사로 그 아이가 찾아왔다고 했다. 후배는 언론사에 제보할 것이 있다면서 자기가 오랜 시간 도청당하고 몸속에도 도청 칩이 심겨 있다는 증거를 모아 왔다고 했다. 도청을 받고 있다는 그 증거들을 복사지 30장이 넘게 인쇄해 가져 와 언론사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선배는 일단 절박하게 호소하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고 했다. 그 뒤 선배와 그 아이와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던 내 동기가 후배를 병원에 데려가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며 돕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이상 돕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아이의 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후배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오래 일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 열풍이 지난 후 서른 중반 미국의 명문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동안 일하면서 번 돈과 전세금을 빼서 미국의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고 죽을힘을 다해 공부를 마쳤지만 미국 대학의 학위를 들고 와도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미국 유학 생활에서도 한국에서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온 유복한 환경의 유학생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한 거 같았다. 아니, 그 아이는 무던히 섞이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당한 거 같았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아이의 심리와 정신에 영향을 미쳤겠지 싶었다. 선배나 동기, 후배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지금 어디서 일하는지,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를 먼저 궁금해 한 그 아이를 보며 가끔은 눈살이 찌푸려졌고 가끔은 안쓰러웠다. 나와 같은 비혼의 그 아이는 가정도 꾸리고 싶어 했으나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다. 후배의 원가족도 정신이 무너진 그 아이를 돌봐 줄 만한 이는 없었다. 알고 보니 후배는 유학 전까지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던 가장이었다. 


  학벌로 줄 세우는 이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자기 자리 하나 마련하려고 유학을 다녀왔지만 여전히 끼리끼리 인 사회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비빌 언덕이 되는 집안도 없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배경이 되어주는 그럴듯한 동문도 없는 비주류 여자대학 출신으로 마흔이 넘어 따온 학위는 힘이 되지 못했나 보다. 부고를 듣고서야 그 아이가 잘살아보려다 그렇게 됐다는 게,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세상이 알려 준 방식대로 살아내려다 그렇게 됐다는 게 뒤늦게 가여웠다. 번번이 그 아이의 속물스러움과 투명한 욕망에 눈을 찌푸리던 나는 얼마나 잘났던 것일까. 한 발 물러서 세상을 조롱하는 나나 그 속으로 들어가서 부서진 그 아이가 얼마나 먼가 싶기도 했다. 적어도 그 아이는 나보다 뜨거웠다. 


 그 아이의 언니가 친구에게 알려준 부고는 선배에게 알려지고 선배는 나에게 알려줬다. 이미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알려진 부고였다. 

잘 가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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