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주변을 살피며 명랑하게
3월호에 글을 쓰기에 앞서 호칭 때문에 망설이는 시간이 좀 길었다. 이번 글의 주인공인 유정수 님을 칭할 때 할머니라고 하나, 여사님 어르신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세상의 할머니들은 할머니 이전에 다 다른 내력을 지닌, 제 이름을 지닌 개성적 존재다. 부르는 자의 편의에 의한 ‘할머니’라는 호칭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 여사님, 심지어 어머님, 강사로 나간 학교에서 정규직 교사에게 불린 이봐요 언니까지 나를 당황케 한 호칭들은 얼마나 많았나. 백반 집 이름 앞에 붙은 이모님은 또 어떤가? 이모, 고모, 누나, 언니까지 친인척을 부르는 호칭들로 여성을 호명할 땐 그녀들의 돌봄까지 뻔뻔히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친분 없는 개별자 여성을 고민 없이 바로 할머니, 이모, 언니라고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하여 기록되는 이 글에는 할머니가 아닌 고유한 이름 석 자를 쓰기로 했다.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 가장 최고령자인 36년생 유정수 님을 처음 만난 건 넝쿨 뜨개모임에서다. 뜨개코도 잡지 못하던 나에게 뜨개질을 알려준 유정수 님의 뜨개질은 쉽고 실용적이다. 매뉴얼대로 하기보단 당신이 아는 기술을 응용해 창의적인 시도를 한다. 새로운 뜨개 기술에 기죽지 않고 하다 안 되면 쉬고 더러 깔끔하게 포기도 잘했다. 잘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즐기는 태도는 모임에 온 분들 중 최고였다. 뜨개모임에서는 유정수 님을 장난스레 감독할머니라고 부르는데 판단과 선택이 필요할 때마다 쿨한 결정을 해주기 때문이다. 더러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는데 그건 가는귀가 어두운 탓이지 노여워서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봉제 공장에 다녔는데 미싱으로 박지 못하는 바짓단 등에 손바느질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재바른 손으로 자투리 실을 활용해 근사한 뜨개 코트도 뚝딱 만들어 환호를 받기도 했다. 공장 다니던 시절을 즐거운 시절이라고 추억하는데 당시에 돈도 꽤 벌었지만 손에 쥔 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하나도 없다’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는 건 내 손으로 집안을 건사했다는 자부심이 묻어 나와 그런 거 같았다. 유정수 님은 지금도 주기적으로 공공근로를 나간다. 가끔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폐지를 모으거나 빈병을 수거해 큰 자루에 담고 계실 때가 있다. 내가 들어드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이 정도는 아직 너끈하다고 말한다. 유정수 님처럼 남편벌이가 부실해 홀로 가정경제를 책임진 여성들은 생각보다 많다. 제 힘으로 자기 삶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진 걸출한 여성들은 많이 배우지도, 주변에 도와줄 이도 변변찮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전쟁을 겪고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세대가 으레 그렇듯 유정수 님도 늘 바지런하다. 철산 4동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사계절 내내 푸른 푸성귀와 꽃들이 쪽대문을 장식하는 집이 있다. 한겨울에도 낡은 화분에 김장 무를 살뜰하게 키워 싱싱한 무청 잎에 눈이 환해지곤 했는데 그 집이 유정수 님 댁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무와 상추와 고추를 키우는 게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웃에게 나눠주는 걸 더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모임을 마치고 내려가는 나와 동료에게 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손을 끌어 댁에 간 적이 있다. 딸기와 바나나를 예쁘게 접시에 담고 마들렌과 빵도 내어오고 달달한 봉지 커피도 타주셨다. 라면까지 끓여 준다는 걸 겨우겨우 말렸다. 그날 둘러본 집 안은 말끔하고 단정해서 유정수 님과 닮아있었다. 현관 안에 들여놓은 군자란 화분들은 푸르렀고 잘 정리된 세간들은 깔끔했다. 나와 동료에게 내어 준 마들렌과 빵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푸드 트럭에서 준 식료품들인데 유정수 님 표현을 빌자면 ‘내가 없이 살다 보니 나눠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유정수 님은 싱싱한 푸른 것들을 손수 길러 이웃에 나누는데 푸드 트럭에 실려 오는 것들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가공식품이었다. 하지만 경로야 어떻든 유정수 님의 손에 이르면 살갑고 다정하게 모두에게 나눠진다.
가난한 노인에 대해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란 생각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거의 가난할 내 미래를 자주 불안해했다. 이 태도가 노인을 타자화하고 가난을 혐오하는 태도라는 건 배운 여자의 교양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머리로 안다고 불안이 눅여지는 건 아니고 나의 가난이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교양과 지성은 별로 힘이 없다는 걸 알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유정수 님을 만났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주변을 살피며 명랑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노년여성이 많다는 걸 이젠 안다. 낙담하고 좌절하기 전에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고 맹렬히, 혹은 낙관으로 살아가는 늙은 여자들에게 어떤 페미니즘 철학보다 더 울림을 얻는다. 삶의 재능은 가장 낮은 자리의 여성들에게 몰려 있는지 귀한 꽃들은 이곳에서 피어난다. 젠 체 않고 의젓해서 오만한 것들만 그 귀함을 모를 뿐이다. 36년 생 유정수라는 꽃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