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람 Oct 21. 2023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변수에 대처하는 자세


'만취금지 감기금지'


'디 에어하우스(The Airhouse)'라는 언더그라운드 뮤직 페스티벌에 갈 때, 나와 친구들이 항상 외치는 슬로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에어하우스에 매년 참여할 때마다 만취하거나 감기에 걸려 페스티벌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양주의 어두운 산길을 만취한 친구들을 차례로 업고 내려오기도 했고, 갑자기 몸살에 걸려 페스티벌 현장 근처 보건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23년의 에어하우스는 달라야만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변수에게 우리의 즐거움을 빼앗길 수 없었다. 우리는 '만취금지 감기금지'를 시도 때도 없이 연호하며 페스티벌 며칠 전부터 완벽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만취하여 헤롱대는 일이 없도록 각종 자양강장제와 숙취해소제, 비타민계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영양제 등을 미리 구비해 두었고, 감기 따위에 지지 않도록 PT 등을 통해 체력관리를 미리 해두었다. 페스티벌 주간에 무리하지 않도록 업무 스케줄 관리를 미리 해두는 것은 필수였다.


이 정도 준비를 해두니 의상과 헤어에도 욕심이 생겼다. 평소 페스티벌에 편안한 복장으로 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2박 3일 착장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다. 짧은 머리도 길게 연장을 해보았다. 그야말로 페스티벌을 위한 변신이었다. 이제 정말 강원도 양양으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페스티벌 당일, 다행히 만취도 없고 감기도 없었다. 하지만 양양에는 비가 내렸다. 그것도 아주 많은 비가 내렸다. 거의 5시간을 운전해서 양양에 도착한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망했다- 라는 말만 떠올랐다. 시내에 있는 큰 마트로 가서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흰 우비를 사 입었다. 기껏 준비한 의상들은 하나도 뽐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한 무리의 Club H.O.T.(H.O.T. 팬클럽) 같아 보일 뿐이었다. 페스티벌 현장의 땅은 질퍽했고 텐트 안은 축축했고 음식 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페스티벌을 즐기러 온 것인지 재난을 체험하러 온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차 올라 친구들에게 예민하게 굴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DJ의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우비도 입지 않은 상태로 너무나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양손에 술잔을 들고 신나게 리듬을 타며 스테이지를 누볐다. 그래, 내가 '만취금지 감기금지'를 외치며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 바로 저런 것이었는데, 무엇이 저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만들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좋은 일만 계획하죠. 하지만 어디 계획대로 되나요?'




어느 보험회사 광고의 멘트처럼 인생은 절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늘 우리의 계획을 무력하게 만드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수능날 아침 늦게 울려버리는 알람처럼, 중요한 면접날 크게 올라와 버리는 뾰루지처럼, 휴가 첫날 갑자기 취소되어 버리는 비행기처럼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온 페스티벌날 갑자기 내리는 폭우처럼 말이다. 삶이 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칠 때면 마음의 갈피를 잡는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불행과 변수를 마주하는 태도가 저 친구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만들었다. 비는 그치게 할 수 없었지만 이 시간을 진정한 페스티벌로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때부터 나와 친구들은 그 친구들 무리를 따라 우비의 앞섶을 풀어헤치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러니 모든 게 편해졌다. 새 옷과 머리가 모두 비에 쫄딱 젖는 것은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에 연고를 덧바르고 또 덧바르면서 신나게 음악을 즐겼다. 계속 내리는 비에 술잔이 계속 리필되니 이것은 어찌 보면 이득이라고 우리끼리 키득거리기도 했다. 늦은 밤과 새벽에는 비가 잠시 그치기도 해서 우비를 벗고 홀가분하게 놀았다. 그때는 비 그친 숲 속의 청량한 공기에 제법 황홀하기까지 했다. 아마 비가 온다고 숙소로 그냥 돌아가 버렸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페스티벌 당일 내렸던 비가 사고처럼 날아든 불행이었다면 우연처럼 찾아온 행복도 있었다. 에어하우스 둘째 날, 유튜브 ASMR에서나 들을법한 아름다운 새소리에 텐트에서 눈을 떴다. 새벽까지 놀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잠깐 잠이 들었던 것인데, 내 생애 그렇게 크고 선명한 새소리는 처음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텐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이미 날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고, 숲에는 안개가 뿌옇게 껴있었고, 그 틈을 타고 멀리서 작은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텐트를 빠져나와 자고 있는 친구들을 놔두고 혼자서 스테이지 쪽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그곳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침 안갯속에서 몽환적이고 트라이벌한 사운드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새소리까지 더해지니 딱 내가 꿈꾸던 아침 레이브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숲 속에서 혼자 아침 레이브를 즐겼다.


만약 전날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으면 나는 텐트에서 잠깐 비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냥 숙소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고 나는 꿈꾸던 아침 레이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불행이 당장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고 해서 너무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곧 그만큼의 행복이 존재감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도 되니까. 역시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재밌다.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이전 07화 평일 새벽의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