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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0. 2020

어떤 백수는 토요일에 740 버스를 탄다

에세이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기서부터는 미리보기만을 제공합니다---


흑백영화 같던 인생이 갑자기 컬러영화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세상을 향한 모든 감각이 또렷해지고, 마음이 말랑해지면서 내가 정말 살아있다고 느끼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백수가 되고 난 후, 내 인생에서 아주 오랜만에 그런 시간을 만났다. 신촌에서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740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조차 남지 않을 귀갓길이겠지만 내겐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중



에세이 수업,

마음을 나누는 시간



이사를 하고 나서 한 달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꾸준히 요가를 하면서 몸과 마음의 회복기를 가졌다. 그렇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쉬고 나니 신기하게도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이 슬슬 샘솟았다. 우선은 내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에세이 쓰기’를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찾아 등록하는 것이었다. 학원부터 찾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범생스러운 선택이라 슬쩍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오전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진행하시는 에세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라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이태원이나 홍대 어딘가에서 불금을 보내고 토요일 오후까지 퍼질러 자기 바빴고, 기껏 ‘이번 주말에는 뭘 해야지’ 다짐을 해놓고도 도무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악착같이 지하철에 몸을 싣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동안 무기력증을 앓던 내가 이렇게까지 의욕적일 수 있다니, 마음이 설레는 일에는 자연스럽게 몸이 부지런해지는구나 싶었다.


에세이 수업 수강생들은 볕이 잘 들어오는 통유리 강의실에 뺑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수업을 들었다.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서로의 눈만 보고 수업을 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작가님은 이 시간을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표현하셨다. 처음엔 조금 오그라드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세이에는 정말 개인적이고 내밀한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수강생들은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매우 진한 농도로 글에 녹여냈다. 그 까닭에 단지 글을 함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적으로 이야기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이 참 가깝게 느껴졌다.


글을 쓰는 데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공이 들지 않던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글로 쓸만한 순간을 포착하고, 삶에 대한 사유를 잘 전달하기 위해 글을 몇 번이나 깎고 다듬어야 한다. 그렇게 타인의 응축된 삶의 정수를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새로운 자극이자 정말 큰 행운이었다. 글쓰기의 기술적인 배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나, 다양한 모양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이 수업은 의미가 컸다.

    

수강생들은 수업시간에 짧게 글을 쓰고 돌아가면서 본인의 글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낭독을 마쳤을 때, 작가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공감과 지지를 보내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온 세상으로부터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또, 지나가는 말로라도 ‘글이 참 좋다.’, ‘잘 쓴다’라는 칭찬을 들으면, 한동안 죽어있던 내 안의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의욕이나 설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글쓰기 수업은 내가 이제까지 경험해 본 그 어떤 심리치료보다 효과가 확실했다.


 그 날의 글쓰기 주제가 ‘나를 왈칵하게 하는 사람’이거나 ‘죽음’ 일 때는 수업 중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누군가 아끼는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면, 마스크 위로 붉어진 눈들이 여기저기 떠올랐다. 아, 이래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하는구나, 그때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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