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랑 Aug 06. 2023

김치,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방콕 김치 맛집 - 그랜드 하얏트 에라완 베이커리

나는 명인 손맛 저리 가라 하는 엄마표 김치를 먹으며 자랐지만, 십 대 중반 시절부터 혼자 해외생활을 하면서는 냉장고에 김치를 두고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어려서부터 한식이 주식이 아닌 환경에 있으니 자연스레 김치 없는 식사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종종 사 먹는 김치에서 나는 원인 모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나를 김치와 더 멀어지게 한 것도 있다. 그래서 나는 김치 없이 사는 한국인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오랜 해외생활을 이어왔다. 정확히는 최근 방콕에서 우연히 김치맛집을 찾기 전까지 그랬다.



방콕에서 찾은 의외의 김치 맛집


혼자 집에서 뭉그적거리던 어느 주말. 갑자기 뭔가 매우면서도 개운하고 시원한 음식이 당겼다.

그래, 김치야. 김치를 먹어야겠어. 당장 배달을 시키겠어.


바로 전날 먹은 자극적인 배달음식의 망령에 씐 것이 분명했다. 난데없이 김치를 부르짖는 마음의 소리에 저절로 내 손가락이 움직여 배달앱을 켰다. 다행히 방콕에 김치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차고 넘치게 많다. 마트, 반찬가게, 한식당 여기저기에서 김치를 대용량으로 판매하니 그중에 나만 모르는 김치 맛집이 있을 것이다.

한식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방콕 시내 대부분 마트에는 냉장식품 코너에 김치를 판매하고 있다.

다만 가깝게 교류하며 지내는 한국인 지인이 없어 대체 어디 김치가 제일 맛있는지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내 김치를 향한 욕구는 간절했고, 나는 쓴맛이 나는 맛없는 김치여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배달앱을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kimchi'라고 검색해 배달앱 스크롤을 한없이 내리던 중, "뭐야,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하는 식당이 하나 눈에 밟혔다. 방콕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에라완 베이커리에서 뜬금없이 김치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서울 포시즌스 라운지 카페에서 홈메이드 쏨땀 파는 소리래?

Grab 앱에서 발견한 의외의 김치 맛집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구글에 검색해 보니 텔 페이스북 페이지에 몇 년 전 올라온 홍보글을 찾을 수 있었다. 무려 한국인 셰프님이 직접 한국에서 공수한 재료들 (젓갈, 고춧가루, 배추, 무까지!)로 고향의 맛을 살려 만드는 김치라는 거다. 이야. 느낌이 왔다. 이거 내가 방콕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김치 중에 엄마표 김치 맛에 가장 가까운 맛일 것 같다.


그랜드 하얏트 에라완 방콕 호텔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제된 심영대 셰프님의 홈메이드 김치 홍보글


게다가 호텔에서 파는 김치인데 가격이 1kg에 235밧 (약 8,800원)으로, 마트에서 파는 김치보다도 훨씬 저렴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나는 곧장 1kg 용량 김치 두 통을 주문했다.

방콕 시내 마트에서 판매하는 종가집 김치. 할인 전 가격은 500g에 275밧 (약 10,400원)
태국 로컬 브랜드에서 나오는 김치들. 150g에 69밧 (약 2,600원)
에라완 베이커리에서 주문한 묵직하고 든든한 1kg 용량 김치

영대 셰프님의 김치는 우선 냄새부터 합격이었다. 맛은 아주 깔끔하고 시원하다. 마트 김치 특유의 씁쓸한 맛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랫동안 김치 없이 살던 나에게 한국인의 DNA에 새겨져 있는 김치 사랑을 첫 입에 일깨워주는, 그런 맛이었다.


그날 이후로 김치 없이 살던 시절의 나는 없다. 나는 이제 모든 음식에 김치를 얹어먹고, 볶아먹고, 지져먹고, 끓여 먹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김치를 먹으려고 식사를 하는 사람처럼 밥을 먹고 있다. 지금껏 어떻게 김치 없이 살았을까 싶게, 벌써 네 번째 김치통이 바닥을 보여가고 있다.


파스타에 김치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다 때려넣은 볶음밥에 김치
두부엔 김치볶음
고등어엔 맨김치
고기국수에도 맨김치


방콕에 장기거주하러 오는 분들에게 에라완 베이커리 김치를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마트에서 사 먹는 김치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장담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