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퇴사하지 말라고? 가끔은 대책 없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
회사 다니기 싫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시작은 끝없는 야근과 주말근무였지만, 이는 점점 내가 원하는 인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게 내가 원하던 일상이었나?
나는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나?
내 인생은 이대로 끝없이 이어져도 좋은가?"
아니, 아니었다. 회사원이었던 내 삶은 내가 원하던 일상이 아니었고,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심지어 내 인생이 이대로 끝없이 이어진다면 당장 죽는 게 낫지 싶었다.
고민 가득한 3년 차 회사원의 늦여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이자 나의 첫 사수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선배는 왜 그랬을까. 다른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걸까?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어딘가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선배.
대리로 승진되자마자 대책 없이 퇴사를 했다. 우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행을 갔다. 퇴사하고 대책 없이 여행을 가고, 그리고 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주 많이 변했다. 회사에 계속 있었다면 절대 겪지 못했을 세상에 적응하면서 한 걸음씩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2015년 3월:
퇴사를 하고 바로 쿠바로 갔다. 쿠바에서 돌아가는 비행기까지 취소하고 두 달을 머물고는 남미로 갔다. 갈라파고스에서 일도 하고, 물개랑 거북이를 질리도록 보고 여행을 계속했다. 호스텔 주인아저씨가 나를 Mi amor(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순간 중남미 대륙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2015년 9월:
한국에 돌아왔다. 그동안 써뒀던 글로 브런치 작가 신청이 통과되었다. 여행 후 조금 남은 퇴직금으로 학자금 대출을 모두 정리했다. 고등학생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웠다. 해금과 사주명리학, 살사와 수영. 불안한 마음에 이곳저곳 복권 당첨을 기다리듯이 9월 취업 시즌 원서를 넣었다. 한 신문사의 서류전형을 통과했고 필기시험을 봤다. 내가 정말 상식이 부족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글쓰기와, 여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016년 3월:
대형 온라인 여행사에서 계약직 알바. 여행지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쓰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글만 썼다. 글쓰기로 돈을 받고 일한다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 하지만 어떤 회사든지 회사는 다 짜증 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2016년 9월:
중남미 전문 여행사에서 국외여행 인솔자로 근무. 정신없이 깨지고, 배우고.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한 달 내내 남미 여행을 다니는 것이 전-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남미는 옳다.
2018년 6월:
1인 출판사를 만들었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동안 모아둔 글을 가지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추석 연휴 내내 방에 틀어박혀 시길(Sigil, 전자책 만드는 프로그램)만 쳐다봤다. 결국 전자책 한 권을 완성했다.
2019년 2월:
독립출판사인 하모니북과 함께 '한 번의 퇴사, 열 번의 남미' 종이책 펀딩을 시작했다. 현재 186% 달성.
입사만큼 퇴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요즘, 절대 대책 없이 퇴사하지 말라는 조언을 자주 목격한다. 물론 뭐든 대책이 있다면 얼마나 인생이 편하겠는가? 하지만 가끔은 대책 없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인생을,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면 먼저 지금 가던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길을 잃어야 한다. 그럼 우연인지 필연인지 길은 나타난다. 언제까지 이 아름다운 우연이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내 인생을 더욱 다채롭게 채워주었던 것처럼.
대책 없는 퇴사와 여행, 그리고 그 대책 없음이 만들어낸 나의 엉망진창 와장창 커리어. 그래도 아직까지는 꽤나 재밌는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더 궁금하다면 현재 펀딩 중인 책을 참고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