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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ya Mar 26. 2020

[#하루한줄] 우파니샤드

불교? 힌두교? 

이스라엘 여행을 하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항상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종교가 뭐니?' 론리플래닛에서 읽은 바로, 종교가 없다거나 무신론자라고 하면 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그래서 항상 나의 대답은 '불교'였다. 그럼 물어본 사람이 할 말이 없어지니까,, 뭐 나름 친한 스님도 있고 ㅋㅋㅋ 절에 가는 것도 좋아하고 하니까, 내 마음의 절반은 불자라고 본다. 그나마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도 불교였고. 그러다가 한 유대인 친구가,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고 나는 불교라고 했다. 근데 너무 자세하게 물어보니까 나도 잘 모르겠는거다. 삶이 고통이고, 해탈해서 윤회를 끊는 게 불교도의 목적이다... 까지는 알겠는데 왜? 왜? 왜? 라며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나도 정말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 오면 불교 책 좀 읽어봐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전부터 지대넓얕에서 이름만 들었던 '우파니샤드'를 시도했는데, 어머나,, 알고 보니 이건 힌두교 책이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젠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마지막에 힌두교/불교의 차이에 대해 나와서 깨달았지, 그 해설이 없었으면 나는 지금까지도 우파니샤드가 불교 고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거다 ;;; 이런 무식,,, 여튼 전자도서관 중에 우파니샤드 원전이 있는 곳은 없어서 풀빛 출판사에서 나온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 중 우파니샤드 편을 읽었는데, 딱 좋았다. 내 수준에 딱 맞았다ㅋㅋㅋㅋ 철학서는 청소년 시리즈를 읽어도 좋은 듯. 


현대 사회는 매일매일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누구나 더 많이 알려고 애쓴다. 그런데 많은 지식과 사상, 정보들이 세상에 넘쳐나도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전보다 더 많이 불안해하고, 더 허탈해하고, 더 괴로워한다. 왜 그럴까? 어쩌면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읽느라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시간과 여유가 없어 안정되기 어렵고, 만족하기 어렵고,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해탈: 윤회를 그만하게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인도 철학에서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즐거움이라기보다 고통이라도 보기 때문에 윤회를 그만하게 됨으로써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삶의 목적, 윤회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 우파니샤드식으로 대답한다면 해탈하기 위해서가 될 것이다. (...) 이 몸뚱이가 삶을 살면서 만든 업에 따라 다시 윤회할 때는, 윤회라는 굴레를 지고 다니는 자기 자신(아뜨만)이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아뜨만은 아무런 굴레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다. 윤회를 하는 자기 자신 안에 윤회와 전혀 관계가 없는 아뜨만이 있다는 것이다. 윤회의 굴레를 지고 다니는 자기 자신은 여러 가지 속성에 이끌려 이리 가기도 하고 저리 가기도 하는데, 그 결과 그는 본래 자신 안에 든 자유로운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몸뚱이와 연계된 자신만을 진짜 자신이라 착각하고, 수없이 태어나고 죽고 두려워하고 당황하고 욕망하고 괴로워하는 윤회 속에 스스로를 가둬 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힌두교 경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베다와 우파니샤드 시대에는 힌두교라는 종교가 없었다. 나중에 힌두교와 불교 등의 종교 전통이 형성되면서 베다는 힌두교를 상징하는 최고 경전이 되었고, 우파니샤드는 베다 정신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여겨졌다. (...) 불교는 형식적으로는 베다의 제사를 부정했기 때문에 인도 철학사에서 우파니샤드와는 다른 계열로 분류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우파니샤드에서와 같이 삶을 고통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며, 업과 윤회, 해탈의 개념도 공유한다. 이렇게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주제를 공유하기는 했지만 존재의 참모습(아뜨만)이 아닌 '공'을 추구했다. 부처는 이러한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우파니샤드가 삶의 고통을 나의 완성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다면, 불교는 그것을 '나'에 연결된 집착을 버림으로써 이룩해야 한다고 한것이다. 

명상을 시작한지 3일이 지났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글을 쓰는 100일 동안 매일 아침 명상을 해볼 계획이다. 불교든 힌두교든 간에 확실히 나는 동양 철학에 더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시간이 많을때.. 놀때...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ㅋㅋ



#작은습관이꿈을만든다고믿는다

#좋은마음은널리퍼진다고믿는다



참고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 중 우파니샤드 / 풀빛 출판사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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